
1. 내면의 고발자와 마주한 인간, 그리고 은혜의 법정
우리의 마음은 종종 스스로를 피고석에 앉히고 끊임없이 정죄하는 은밀한 법정이 되곤 합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심판』 속 주인공처럼, 현대인들은 무엇 때문인지 명확히 알 수 없는 죄책감과 불안의 공기 속에서 숨이 막힌 채 살아갑니다. “내가 과연 온전한 자격이 있는가?”, “나의 은밀한 허물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들이 끊임없이 귓가를 맴돌며 영혼을 갉아먹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양심과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고발의 목소리는 매우 집요하고 강력해서, 우리의 힘으로는 그 결박을 스스로 풀기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자)가 전하는 로마서 8장 31~34절의 강해는, 이처럼 차갑고 절망적인 인간 내면의 재판정 한복판에 완전히 새로운 반전의 음성을 선포합니다. 기독교의 본질인 복음은 인간이 스스로를 치열하게 변호하여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 내는 처절한 투쟁의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완벽하게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선언해 주신 “너는 의롭다”라는 거룩한 판결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이 위대한 말씀의 중심에는 우리가 가진 어떠한 연약함과 죄책감도 능히 뛰어넘는 확실한 구원의 보증이 있으며, 세상의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구원의 확정성과 성도의 견인
사도 바울은 로마서 본문을 통해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라며 장엄한 질문을 던집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일’이란 결코 단편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계획하신 미리 아심과 예정, 그리고 시공간 속에서 우리를 찾아오신 부르심, 십자가의 피로 씻어주신 의롭다 하심을 거쳐 마침내 도달하게 될 영화롭게 하심에 이르는 거대하고 완전한 구원의 전 과정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유한한 시간 속에서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면, 여전히 쓰러지고 낙심하며 영적인 실패를 반복하는 부끄러운 모습만 가득해 보입니다. 구원의 최종 완성이라는 고지는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영원의 관점을 가지신 하나님의 시야 안에서 이 구원의 여정은 흔들리는 불확실한 가능성이 아니라, 이미 성취된 명확한 약속입니다. 바울이 미래에 일어날 영광스러운 변화를 두고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는 과거형 표현을 사용한 것은 매우 깊은 신학적 위로를 줍니다. 비록 성도가 오늘을 살아갈 때는 자신의 불완전함 때문에 절망할지라도, 하나님 편에서는 그 구원을 이미 확정된 현실로 바라보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이란 내 감정이나 상태가 괜찮다는 주관적인 낙관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상태와 상관없이,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시작하신 선한 일을 그분의 열심으로 반드시 끝마치실 것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신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이 선언은 우리의 삶에서 고난과 시험, 내면의 어두운 폭풍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현실의 대적과 위협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우주의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이미 내리신 무죄 판결을 그 어떤 대적도 감히 뒤집을 수 없다는 영적 승리의 선포입니다. 성도가 누리는 소망은 감정이 맑고 은혜가 충만한 날에만 일시적으로 작동하는 신기루가 아닙니다. 영혼의 밤이 찾아오고 감정이 지독하게 흐려진 날에도 결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법적 판결, 즉 복음의 단단한 기초 위에 세워진 영원한 바위와 같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은혜의 연속성을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라는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적 통찰로 심도 있게 풀어냅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택하고 부르신 자녀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부들어 이끄신다는 이 진리는, 인간의 도덕적 책임이나 거룩한 삶을 향한 노력을 가볍게 만드는 방종의 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도저히 스스로 일어설 힘이 없는 영적 무력감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비하셨던 첫사랑을 기억하며 다시금 무릎을 일으켜 세우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동력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주님을 향해 품는 인간적인 결심보다 언제나 먼저 존재하며, 낙심하여 우리의 손귀가 허무하게 풀려버리는 극단의 순간에도 우리를 꽉 쥐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은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3. 영혼을 가두는 자책의 감옥을 부수는 참된 회개와 순종
그리스도인의 신앙 여정에서 가장 치명적인 대적은 사탄의 외부적인 박해나 환경의 어려움보다, 영혼 깊은 곳에서 고개를 드는 스스로를 향한 저주와 자책의 목소리일 때가 많습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의 죄를 들춰내며 고발합니다. 이로 인해 생겨나는 영적 침륜은 겉보기에는 매우 진지하고 경건한 자기 성찰처럼 위장되기도 하지만, 그 본질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과 십자가의 능력을 내 판단보다 작게 만드는 교묘한 불신앙의 덫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내면의 법정을 허물고 사도 바울이 선포한 진리의 질문을 붙잡으라고 도전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우리를 의롭다고 최종 선언하신 분이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시라면, 세상 그 어떤 인간의 비난이나 사탄의 고발도 우리에게 영원한 형벌을 내리는 마지막 판결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결코 죄를 가볍게 여기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도덕적 해이의 언어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회개는 단순히 자신의 허물을 숨기거나 스스로를 가혹하게 벌하는 형벌적 행위가 아닙니다. 진짜 회개는 나의 흉악한 죄악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크고 넓으신 하나님의 자비의 품 안으로 겸손히 도망치는 영적 돌이킴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는 율법주의적 자책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앞에서 사탄이 주는 거짓 정죄의 무거운 짐을 과감히 내려놓고 나를 용서하신 은혜를 기쁘게 수용하는 믿음의 순종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믿음이란 스쳐 지나가는 감정의 고양이 아니라, 진리 위에 서는 가장 견고하고 단단한 영적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평안이 밀려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겨우 믿는 수준을 넘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가 성경을 통해 먼저 확고하게 선언되었기에 내 요동치는 감정과 불완전한 생각을 그 말씀의 권위 아래 굴복시키는 것이 진짜 믿음의 실력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조건 없이 택하시고 은혜로 부르셨다는 신실한 사실만이 우리 신앙의 유일하고도 영원한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붙잡고 있는 내 결단과 행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시는 주권적 은혜가 구원의 유일한 근거가 될 때 비로소 자기 정죄의 어두운 그림자는 우리 영혼의 왕좌에서 영원히 쫓겨나게 됩니다.
요한복음 8장에 등장하는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의 서사는 이러한 복음의 찬란한 빛을 가장 극적으로 시각화하여 보여줍니다. 당시 종교 기득권자들은 정죄의 돌멩이를 높이 들고 숨이 막힐 듯한 심판의 대형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전혀 없으신 유일한 심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으로 인간의 위선적인 법정을 단번에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리고 고소자들이 모두 떠나간 적막한 자리에서 여인을 향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거룩한 분께서 정죄하지 않으시겠다고 선언하셨다면, 허물투성이인 죄인이 다른 죄인을 향해, 혹은 자기 자신을 향해 치켜들었던 정죄의 돌멩이는 얼마나 쉽게 내려놓아야 마땅하겠습니까. 이 압도적인 은혜의 말씀 앞에서 참된 믿음을 가진 자는 자신을 난도질하던 자책의 돌을 버릴 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타인을 향해 겨누고 있던 날 선 비판과 정죄의 돌마저도 부끄러움 속에 조용히 내려놓게 됩니다.
4. 부활하신 대제사장의 현재적 중보와 공동체의 회복
로마서 8장 34절에 이르러 바울의 논증은 성도의 구원과 확신을 우주의 심장부이자 하나님의 보좌 우편이라는 가장 영광스럽고 확고한 자리로 이끌어 올립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실 뿐만 아니라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고 계신다는 성경의 증언은 우리의 구원이 과거 골고다 언덕에서 끝난 단회적 사건에 머물지 않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완벽하게 청산한 법적 지불의 장소였고 부활이 죽음의 권세가 완전히 패배했음을 알리는 우주적 선포였다면, 지금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의 존재는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끝까지 책임지시는 대제사장으로서의 현재적 통치와 중보를 의미합니다.
이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는 우리의 영성이 충만하고 기도가 유창하게 잘 터지는 날에만 필요한 보조적인 위로가 아닙니다. 오히려 낙심이 깊어 기도의 언어가 완전히 막혀버리고, 마음의 중심이 산산조각 나며, 차마 고개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추호의 자격조차 없다고 느끼는 영적 파산의 순간에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소망의 핵심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언어가 빈약해지고 영적으로 완전히 고갈될 때에도 결코 영원한 버림을 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보다 앞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하나님 아버지 앞에 당당히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끊이지 않는 눈물의 탄원과 간구가 지금도 우리를 보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의 은혜로운 고찰은 이 위대한 중보의 사역을 재판정의 역동적인 이미지로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우리는 사탄의 날카로운 기소 앞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변호해야 할지 몰라 절망하는 미련하고 무력한 피고와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완전하고 흠 없는 완벽한 변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엄격한 율법의 잣대로 보면 여전히 드러날 죄와 허물이 산더미 같지만, 우리의 공의로우신 변호인은 “내가 이미 십자가에서 나의 피로 저 사람의 모든 죄 값을 완벽하게 지불했습니다”라며 자신의 상처 난 손과 발을 아버지께 내보이십니다. 그렇기에 “누가 감히 정죄하리요”라는 바울의 위대한 선언은 공허한 수사학적 외침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늘 법정에서 울려 퍼지는 그리스도의 완벽한 중보 사역 위에 든든히 세워진 성도의 가장 담대한 승전가입니다.
더 나아가 이 구원의 확신은 나 개인의 내면적 평안과 안락함이라는 울타리 안에만 갇혀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엄위하신 법정에서 정죄의 사슬로부터 영원히 해방된 자유인은, 더 이상 타인을 정죄하거나 깎아내리는 유치한 방식을 통해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하나님께 용납받은 은혜의 깊이와 사랑의 넓이가 얼마나 압도적인지를 절실히 깨달은 사람은, 자신이 속한 교회와 가정,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정죄의 칼날을 거두고 치유와 용서, 그리고 회복의 따뜻한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은 기독교 신앙의 화려한 장식품이 아니라, 정죄 없음의 은혜를 경험한 자들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고 조용하게 맺히는 가장 확실한 복음의 열매입니다.
5. 흔들림 속에 피어나는 참된 샬롬과 복음의 실천적 능력
기독교가 말하는 성도의 견인은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아무런 유혹도 받지 않고 영적으로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는 철인(鐵人)이 된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성도의 견인이 가진 참된 신비는, 우리가 삶의 수많은 파도 속에서 수없이 흔들리고 가치관이 뒤틀리는 비참함 속에서도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단 한 순간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신자는 여전히 부끄럽게 넘어질 수 있고, 영적인 침체에 빠져 기도가 막힐 수 있으며, 마주하고 싶지 않은 내면의 추악하고 어두운 결들을 보며 몸서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영적 행위는 우리를 절망적인 자기 판단의 어두운 감옥으로 밀어 넣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가득한 판결문 앞으로 우리를 다시 안전하게 인도합니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는 이 한 구절의 말씀은, 인간 영혼의 최종 언어가 세상의 비난이나 사탄의 정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뿐임을 영원토록 인쳐 줍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약속하는 하늘의 ‘샬롬(평강)’은 삶의 모든 폭풍우와 고난의 환경이 기적처럼 소멸하여 찾아오는 일시적인 평온함이 아닙니다. 비록 사방이 우겨쌈을 당하는 환난의 연속일지라도,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온전히 내 편이 되어 주신다”라는 복음의 위대한 진리가 영혼 깊은 곳에 굳게 뿌리내릴 때 찾아오는 신성한 안식입니다. 이 영적 안식은 우리가 마주한 거친 현실을 도피하거나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이 주는 두려움과 협박에 영혼의 최종 왕좌를 결코 내어주지 않는 담대함을 선사합니다. 자기의 가장 소중한 아들마저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향한 구원의 계획을 절대 철회하지 않으신다는 확고한 확신이 있기에, 성도는 오늘이라는 흔들리는 하루 속에서도 다시금 믿음의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깊이 있는 로마서 강해 설교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믿음에 남기는 영적 유익은 실로 거대하고 분명합니다. 구원의 확신은 결코 도덕적 자만심이나 영적 우월감에 도취하게 만드는 독약이 아니라, 평생을 겸손한 감사와 찬양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마르지 않는 샘 근원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행하는 회개 또한 우리를 만성적인 절망의 습관으로 몰고 가는 굴레가 아니라, 언제나 우리를 반기시는 풍성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걸어 들어가게 만드는 축복의 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라는 복음의 정수를 깊이 묵상하고 삶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내면에서 요동치는 정죄와 두려움의 파도를 성숙하게 다스리는 영적 실력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베풀어진 그 엄청난 하나님의 용서를 거울삼아, 연약한 이웃과 공동체의 지체들을 향해 정죄의 손가락질을 멈추고 더욱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사랑의 손길을 내밀 줄 아는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화되어 갑니다. 이처럼 찬란한 복음은 마음의 가장 깊고 은밀한 영적 법정에서 하나님의 판결을 듣는 것으로 시작되지만, 결국에는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온도를 바꾸고, 인간관계를 대하는 태도를 변화시키며,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순종의 방식까지 삶의 모든 영역을 송두리째 성화시켜 나갑니다.
더불어 살아 숨 쉬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가 겪는 삶의 두려움과 고통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위선적으로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두려움의 방향을 바꾸어 거룩한 경외함으로 승화시킵니다. 바울의 위대한 질문들은 성도가 이 땅의 나그네 길을 걸어가며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환난과 핍박, 기근과 적신, 그리고 육체의 가시와 약함들을 억지로 지워버리지 않습니다. 다만 그 모든 극심한 고통의 파도들을 하나님의 거대하고 태산 같은 사랑의 품 안에 소스라치게 부딪히게 함으로써, 환난조차도 우리를 유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보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가지는 신앙의 담대함은 자기의 의지나 힘을 과시하려는 종교적 만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철저한 무력함과 약함 속에서도, 이미 만세 전부터 나를 위하셨고 지금도 나를 위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만을 온전히 붙드는 가장 겸손하고도 위대한 영적 용기입니다.
말씀의 최종 결론은 지극히 명료하면서도 우주보다 깊은 울림을 가집니다. 우리의 구원은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은혜로 시작하셨고,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귀한 피로 영원히 확증하셨으며, 지금도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과 보좌 우편의 중보 사역을 통해 단단하게 보호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의 묵상은 “나는 왜 이렇게 오늘도 나약하고 쓰러지는가”라는 자책의 굴레에 갇혀 절망하는 율법의 자리에 머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선을 높이 들어 “이토록 허물 많고 연약한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그토록 사랑하시며 불꽃 같은 눈동자로 끝까지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가!”라는 경이로운 은혜의 세계로 나아갑니다. 사탄과 양심이 고발하던 정죄의 날카로운 소음들이 십자가의 보혈 아래 완전히 잠잠해진 바로 그 거룩한 처소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노랫소리를 듣게 됩니다.
오늘도 세상의 거센 풍파 속에서 지쳐 돌아온 우리의 마음속 법정에는 과연 어떠한 목소리가 가장 크게 메아리치고 있습니까? 여전히 우리를 주저앉히려는 사탄의 고발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정죄입니까? 그 모든 소음보다 더 깊고 엄위한 영원의 보좌로부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손을 보시며 이미 우리에게 영원한 무죄로 선포해 주신 복음의 대판결을, 우리는 오늘 이 아침에 다시금 영혼의 귀를 열어 기쁨으로 경청하고 있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