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복음의 개척과 은혜의 연대: 사도행전 20장이 밝히는 선교와 사랑의 본질

1. 숭고한 기도의 저녁과 드로아 다락방의 영적 풍경

장-프랑수아 밀레의 명작 〈만종〉을 바라보면, 대지에 조용히 내려앉는 황혼의 황금빛 속에서 흙이 묻은 거친 손을 모아 쥔 농부 부부의 말 없는 기도를 마주하게 됩니다. 치열했던 하루의 육체적 노동이 비로소 가장 겸손하고 고요한 영적 소통인 기도로 낮아지는 순간입니다. 사도행전 20장에 기록된 드로아의 밤 역시 이와 유사한 거룩한 엄숙함과 따뜻함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온종일 세상의 고단한 삶을 견뎌내고 땀 흘려 일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이 어두운 밤 한곳에 모여, 등불을 켠 다락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떡을 떼며 성찬의 기쁨을 나누던 바로 그 시간입니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사도행전 강해 설교는 이 드로아의 밤을 배경으로 삼아, 사도 바울이 걸어갔던 거룩한 발자취를 세밀하게 추적합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방으로 막힌 현실 속에서 어떻게 초자연적인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가 낙심하고 쓰러진 영혼들을 어떻게 다시 사랑으로 일으켜 세우는지를 깊이 있게 성찰하도록 인도합니다. 이 가르침의 중심에는 영혼 구원을 위해 땅끝으로 향하는 원대한 세계 선교의 비전과, 눈앞에 있는 지체를 지극히 작은 자 하나까지 가슴에 품는 구체적인 사랑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심오한 신학적 통찰이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2. 차단된 경로를 뚫고 전진하는 복음의 역동성과 거룩한 우회

사도 바울의 선교 여정은 에베소에서 일어난 극심한 소요 사태 이후 마게도냐와 헬라 지역을 거쳐 마침내 예루살렘이라는 거대한 십자가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 숨 가쁜 흐름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정은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을 이동하는 지리적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본문 강해를 통해, 바울이 자신을 죽이려는 대적들의 수많은 위협과 핍박 속에서 쉼 없이 움직이면서도 복음의 절대적인 핵심과 진리의 순수성을 단 한 순간도 타협하거나 양보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세상의 타락한 관습이나 종교적 기득권과 충돌할지언정, 그 갈등과 박해가 두려워 복음의 고유한 생명력을 흐리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준엄한 메시지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제국의 심장부인 로마는 결코 자신의 사역이 완성되는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땅끝으로 여겨졌던 서바나(스페인)라는 더 광활하고 먼 지경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전초기지이자 길목에 불과했습니다. 그의 영적 시야는 언제나 온 열방과 세계를 향해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사도 바울의 진정한 위대함은, 이처럼 거대한 세계 복음화의 비전을 선포하면서도 정작 당장 굶주림과 핍박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던 예루살렘 모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모른 척 지나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여러 이방인 교회들을 다니며 성심껏 부조와 연보를 모아 이를 예루살렘에 직접 전달하고자 했던 그의 선택은, 참된 선교가 화려한 말의 성찬이나 구호의 확장이 아니라 고통받는 지체를 향한 실제적인 물질적 나눔과 희생적 섬김이라는 진리를 선명하게 입증합니다.

이 설교가 지닌 영적 깊이는 바로 이러한 거시적 비전과 미시적 사랑의 완벽한 균형 감각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계 열방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 나가는 광대함을 지니고 있지만, 결코 눈앞에서 신음하는 지체의 구체적인 아픔을 징검다리 삼아 건너뛰지 않습니다. 멀리 가고자 하는 선교적 열정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웃을 향한 자비와 돌봄을 소홀히 여길 때, 선교는 한낱 공허한 슬로건이나 종교적인 업적 쌓기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바울이 걸어간 연대의 길은 오늘날 우리에게 본질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우리의 믿음은 거대한 하나님의 사명과 비전을 소리 높여 외치면서도, 상처 입은 지체의 작은 신음 소리 앞에 가던 길을 멈추고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따뜻한 심장을 가졌는가 하는 점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복음의 신비는, 사역의 길이 철저히 가로막히고 사방이 우겨쌈을 당했을 때 바울이 결코 자절하거나 원망의 자리에 주저앉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신실한 유대인 대적들의 암살 음모로 인해 당초 계획했던 순탄한 바닷길 이용이 불가능해지고 생명의 위험이 닥치자, 그는 미련 없이 행로를 바꾸어 거칠고 험난한 육로를 통한 우회로를 선택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것은 지체와 손해처럼 보였으나, 그 거룩한 우회 덕분에 바울은 마게도냐의 여러 교회들을 다시 한 번 방문하여 성도들을 위로하고 말씀으로 굳게 세울 수 있는 보배 같은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대적들의 방해는 분명 육체적·정신적인 고통이었으나, 그 고통의 장애물조차도 복음의 위대한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막혀버린 길은 하나님께서 흩어진 성도들을 다시 만나 위로하게 하시는 예상치 못한 은혜의 길목이자 섭리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진정한 순종이란 앞뒤를 보지 않고 맹목적으로 돌진하는 무모한 완고함이 아닙니다. 참된 순종은 환경과 상황을 무시하는 영적 고집이 아니라, 내게 주신 사명의 본질적인 방향성은 굳게 붙들면서도, 변화되는 현실 속에서 영혼을 살리고 공동체를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하나님의 지혜로 새롭게 모색하는 유연하고 담대한 믿음입니다. 바울은 영웅주의에 도취하여 불필요한 위험을 과시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다가오는 죽음의 두려움에 무력하게 굴복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복음이 전진해야 할 최종 침로만을 바라보았고, 그 굴곡진 우회의 과정에서 만나는 연약한 교회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시금 굳건하게 추슬렀습니다.

3. 영혼의 성숙을 위한 끊임없는 재방문과 깊은 돌봄의 책임

사도 바울은 한 지역에 복음의 씨앗을 뿌려 교회를 개척한 이후, 자신의 임무가 끝났다고 여기며 곧장 그들을 잊어버리는 무책임한 사역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개척한 자리를 지속적으로 마음 깊이 품었고, 기회가 닿는 대로 다시 방문했으며, 성도들을 눈물로 권면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제자들의 영혼을 견고하게 뿌리내리도록 세심하게 배려했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성경 묵상은 이처럼 끊임없이 반복되는 영적 돌봄과 재방문의 역사를 복음이 가진 핵심적인 가치이자 본질적인 성격으로 명쾌하게 규명합니다. 선교와 신앙에 있어서 새로운 생명의 씨앗을 대지에 뿌리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연약한 새싹이 거친 세상의 바람과 흔들리는 척박한 땅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날 때까지 오래도록 살피고 양육하는 영적 부모의 책임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은 어떤 강력한 은혜의 체험을 통해 한순간에 시작될 수 있지만, 그 믿음이 성도의 구체적인 삶의 윤리로 베어 나오고 온전한 순종의 인격으로 자라나기까지는 기나긴 인내와 성숙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바울은 땅끝을 향해 가야 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선교 일정 속에서도, 자기 곁에 있는 단 한 사람의 영혼도 가볍게 스쳐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복음을 영접한 이들이 미숙한 어린아이의 신앙에 머물지 않고 명확한 진리의 교리 안에서 장성하며,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짐을 함께 짊어지는 성숙한 지체로 자라나도록 눈물로 씨름했습니다. 이것은 외적인 사역의 확장 속도나 대규모의 숫자보다, 한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깊이 있게 성숙해 가는가를 훨씬 더 소중하게 여기는 참된 목회자적 태도입니다.

또한 본 설교는 바울이 목숨을 걸고 전진해야 했던 험난한 나그네 같은 선교 여정 가운데서도,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일과 골방의 기도를 모든 사역의 절대적인 최우선 순위에 두었다는 사실을 결코 놓치지 않고 짚어냅니다. 바울은 계속되는 장거리 이동의 극심한 육체적 피로와 사방에서 쪼아오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자신이 낳은 교회들을 가슴에 안고 눈물로 기도했으며, 잠시 머무는 시간조차도 허투루 쓰지 않고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편지를 써서 교회를 권면하는 영적 재충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사역의 지경이 넓어지고 외적인 활동이 분주해질수록, 성도의 내면세계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더욱 깊고 고요해져야 합니다. 분주함은 내가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증거가 아니라, 도리어 내면의 은혜를 소진하여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엎드려 더 간절히 기도하라고 부르시는 하늘의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의 교회는 첨단 기술의 발전으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빠르게 소통하고 더 넓은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외적인 연결망이 촘촘해지고 소통의 속도가 빨라졌다고 해서, 우리 마음속에 흐르는 그리스도의 사랑까지 저절로 깊어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스마트폰을 통한 편리한 메시지와 온라인상의 가벼운 소통이 영혼을 향한 실제적인 땀방울과 눈물의 돌봄을 완전히 대신할 수 없으며, 빠르고 방대한 정보의 공유가 골방에서 무릎을 꿇고 지체를 위해 씨름하는 절대적인 기도의 시간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종종 아날로그적인 수고, 즉 지체를 위해 다시 한 번 수고스럽게 찾아가는 발걸음 속에서, 상대방의 아픔을 오래도록 경청하고 묻어두는 침묵의 시간 속에서, 그리고 쉽게 변하고 흔들리는 연약한 사람 곁을 끝까지 지켜주는 눈물의 인내 속에서 비로소 거목처럼 자라나는 법입니다.

바울이 사역하던 초대교회 시대에는 편지 한 장을 멀리 있는 지체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도 수개월의 험난한 여정과 위험한 시간을 고스란히 견뎌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교회들과 성도들은 공간적 거리를 뛰어넘어 서로를 눈물겹게 그리워했고, 사도의 얼굴을 다시 보기를 열망했으며, 바다 건너 멀리 떨어져 있는 이름 모를 지체들의 핍박과 형편을 마치 자신들의 안방에서 일어난 일처럼 아파하며 기도와 물질로 동참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기술적 편리함은 사랑과 돌봄의 깊이를 가볍고 얄팍하게 만드는 변명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과거보다 더 깊고 꼼꼼한 영적 돌봄을 가능하게 하는 축복의 선물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의 속도전이 아니라, 묵묵히 걸어가는 성실함과 진실함 안에서 그 거룩한 광채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세운다’는 위대한 명제는 단순히 화려한 예배당 공간을 확보하거나 가시적인 프로그램과 모임의 숫자를 늘리는 외적 성장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영적인 낙심 속에서 숨이 막혀가던 한 영혼이 생명의 말씀 안에서 복음의 산소로 다시금 숨을 쉬게 되고, 죄악과 유혹 속에서 비틀거리며 흔들리던 다른 한 지체가 믿음의 중심을 잡고 잃어버렸던 거룩한 걸음을 회복하며, 교회 전체가 서로의 존재와 아픔을 이름 불러가며 기억하고 연대하는 영적 가족이 되는 과정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부흥의 역사는 단순한 통계나 숫자의 눈금으로 결코 전모를 측정할 수 없습니다. 은혜는 떠났던 자리를 다시 찾아가 품어주는 사도의 마음, 연약한 자가 자라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 주는 어머니 같은 사랑, 그리고 연약한 자를 기필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세우고야 말겠다는 영적 아비의 책임감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지극히 깊어지는 것입니다.

4. 다락방의 비극적인 추락을 이겨내는 생명의 포용과 공동체의 위로

드로아에 마련된 한 다락방에서 사도 바울은 이튿날 떠나야 하는 촉박한 선교 일정을 앞두고,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른 채 마지막 영적 자산을 다 쏟아붓듯이 간절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모인 성도들은 낮 동안 고된 노예의 노동과 생업의 현장에서 온 힘을 소진한 지친 몸을 이끌고 늦은 밤에 모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중을 지나 자정이 되기까지 생명의 말씀과 성찬의 떡을 간절함으로 나누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좁고 밀폐된 다락방의 열기와 수많은 등불의 끄으름, 그리고 육체의 극심한 피로를 이기지 못해 창가에 걸터앉아 있던 유두고라는 청년이 깊은 졸음에 빠져 삼 층 아래 바닥으로 추락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순간 다락방의 은혜로운 분위기는 산산조각이 났고, 사람들은 순식간에 닥쳐온 죽음이라는 차가운 절망의 현실 앞에 경악하며 슬픔과 공포로 멈춰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바울은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 속에서도 영적 소란을 키우거나 당황하지 않고, 조용히 다락방 아래로 내려가 싸늘하게 식어가는 청년의 시신을 가슴에 안고 그 위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향해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라고 담대하게 선언합니다. 이 장엄한 선포는 자신의 영적 능력이나 기적의 과시를 위한 영웅주의적 외침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세 아래 짓눌려 허무하게 꺾여버린 한 인간의 소중한 생명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복음의 생명력을 대변하는 거룩한 언어였습니다.

여기서 복음이 말하는 사랑은 고결한 상상 속에만 머무는 추상적인 감정이 아니라, 위기의 현장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는 구체적인 발걸음이자 움직임입니다. 참된 사랑은 안전하고 높은 도덕적 자리에 앉아서 추락한 자의 영적 나태함이나 실수를 정죄하고 판단하는 지적질을 하지 않습니다. 진짜 사랑은 청년이 차갑게 떨어져 고통받고 있는 비참한 바닥의 자리로 자신의 몸을 낮춰 함께 내려가는 성육신적 사랑입니다. 복음의 사람은 공동체 내부에 닥친 위기 앞에서 인간적인 불안과 절망을 부추기며 분열을 조장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가능성을 끝까지 붙잡는 자들입니다. 유두고 추락 사건이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의 우리에게까지 깊은 영적 울림과 전율을 주는 까닭은,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는 하나님의 거대한 은혜가 다름 아닌 상처 입은 한 영혼을 따뜻하게 부둥켜안아 주는 사도의 작은 몸짓과 가슴의 온기를 통해 세상에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기도를 통해 다시 살아난 청년을 마주하며, 다락방에 모여 있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거대한 하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경험한 위로는 단순히 사람의 눈을 현혹하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목격했다는 일시적인 흥분이나 호기심의 충족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비록 척박하고 어두운 세상 한복판에 세워진 작은 다락방 교회일지라도 그 공동체 내부에는 여전히 죽음을 삼키는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의 능력이 요동치고 있다는 확신이었습니다. 또한 말씀을 들으며 밤을 지새우던 영적 열정이 한 청년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절망으로 허망하게 끝나지 않았다는 안도감이었으며,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는 공동체 내부에서 일어난 한 형제의 소외와 추락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짊어져야 할 거룩한 영적 책임임을 뼈저리게 배운 성숙한 위로였습니다. 교회가 상실해 버린 영적 위로의 능력을 다시금 세상 속에서 회복하는 비결은, 더 화려하고 큰 대형 이벤트를 기획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락방 창가에서 떨어져 영적으로, 육적으로 신음하고 있는 소외된 한 사람을 공동체가 차가운 시선을 거두고 예수의 심장으로 함께 품어줄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화려한 현대 사회와 교회 안에도, 보이지 않는 영적 다락방 창가에서 중심을 잃고 차가운 바닥으로 추락해 버린 수많은 현대판 유두고들이 존재합니다. 세상의 거센 풍파와 신앙적 회의감 속에서 낙심하여 예배의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린 영혼들, 감당할 수 없는 경제적 파산과 삶의 무게에 갇혀 숨이 막혀가는 이웃들, 그리고 사회적 편견과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영적인 호흡을 잃어버린 채 영사(營舍)해 가는 형제 자매들이 우리 주변에 가득합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참된 돌이킴, 곧 진정한 회개란 어쩌면 이처럼 창가에서 졸고 있던 연약한 지체들을 향해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라며 너무나 쉽게 정죄하고 판단해 버렸던 우리의 냉랭하고 완고한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돌이키는 일일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조롱 속에서 다시금 생명의 복음의 언어를 온전히 회복하고자 한다면, 추락한 자들을 향해 “이미 늦었고 소망이 없다”는 세상의 절망적인 사망 선고를 내리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직 생명이 있고 다시 살아날 수 있다”라는 부활의 믿음을 먼저 선포하며 다가가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이 다락방의 극적인 사건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뜨거운 열정과, 공동체 지체들을 향한 영적인 책임 의식이 결코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될 수 없음을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밤이 새도록 사모하여 듣는 은혜의 자리에는, 동시에 옆자리에서 졸고 있거나 소외되어 낙심해 가는 지체의 영적 상태를 살피는 따뜻한 눈길이 반드시 공존해야 합니다. 떡을 떼는 성찬의 거룩한 친교의 현장에는, 공동체의 대열에서 이탈하여 홀로 눈물 흘리는 약한 자의 손을 꽉 쥐어주는 책임 있는 손길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합니다. 수평적인 영혼 사랑과 돌봄이 결여된 채 수직적인 종교적 열심에만 치중하는 사역은 쉽게 자기 의의 피로감으로 끝나버리며, 반대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라는 나침반이 결여된 인간적인 사랑은 쉽게 침로를 잃고 세속적인 친목 질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드로아의 밤은 이 두 가지 본질, 즉 말씀에 대한 타오르는 열정과 영혼에 대한 책임 있는 사랑이 황금빛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교회가 세상을 살리는 참된 생명의 구원선으로 우뚝 서게 됨을 가르쳐 줍니다.

5. 한 몸 된 교회의 거룩한 연대 안에서 꽃피우는 소망의 미래

사도행전 20장의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의 곁에는 구브로, 가이오, 디모데, 두기모, 드로비모 등 아시아와 마게도냐 등 각기 다른 여러 지역에서 온 수많은 믿음의 동행자들의 이름이 영예롭게 나열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들은 단순히 바울이라는 거인의 위대한 선교 여정을 먼발치에서 구경하거나 동정하는 수동적인 관람객들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극심한 기근과 박해로 예루살렘의 모교회 성도들이 생존의 위협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자신들이 속한 각 지역 교회의 경계를 뛰어넘어 이 거룩한 구제 구호 사역의 책임을 기쁨으로 나누어 짊어진 진정한 동역자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과 도시에서 나고 자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돕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안에서 마치 하나의 유기적인 몸처럼 일사불란하게 연대하여 움직이는 성경의 장면은, 교회의 거룩한 공교회성과 연대 의식이 한낱 종교적인 이상향이나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라, 성도의 구체적인 삶의 질서이자 역동적인 현실임을 강력하게 증명합니다.

이 설교가 복음의 빛으로 선명하게 비추는 참된 교회 공동체는 결코 바다 위에 홀로 외롭게 떠서 제각기 빛을 발하는 고립된 섬들의 집합소가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한 지체가 연약함으로 아파할 때 다른 지체가 그 통증을 자신의 신경망으로 고스란히 느끼며 귀를 기울이고, 한 지역 교회가 영적·물질적 궁핍함으로 신음할 때 멀리 있는 다른 지역 교회가 자신의 풍성한 몫을 기꺼이 내어놓아 형제 자매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신비롭고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단일한 몸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영광스러운 정통 교리의 문장과 신학 책 속에 안전하게 보존되지만, 그 복음이 가진 가공할 만한 우주적 생명력과 진위 여부는 오직 성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드러내는 희생적인 사랑의 실천과 연대를 통해서만 세상 앞에 그 정당성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에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은, 교회의 외적인 규모의 비대함이나 세상적인 성장 속도에 있지 않고, 복음 안에서 서로의 인생을 끝까지 책임지려 하는 신실한 연대의 깊이 위에서 비로소 자라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보여준 이 위대한 연대의 역사와 정신은 단순한 구제 성금의 물질적 전달이라는 1차원적 구호 사역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서로를 향한 끊임없는 중보기도였고, 진리 안에서의 눈물의 권면이었으며, 거친 선교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함께 걸어갔던 아름다운 동행이자, 서로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거룩한 언약의 언어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한 선교 여정 곁에 언제나 이처럼 든든한 다국적 지체들이 동역자로 동행하고 있었다는 성경의 엄연한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의 확장이 결코 어떤 한 천재적인 영웅의 고독한 열정이나 독주만으로 흘러가지 않음을 보여주는 선명한 증거입니다. 교회는 홀로 설 때 부러지기 쉽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디딤돌이 되고 길이 되어 줄 때 더 먼 땅끝까지 안전하게 전진할 수 있으며, 서로의 무거운 인생의 짐을 어깨로 나누어 질 때 거센 환난의 바람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더 오래 견뎌낼 수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가 사도행전 20장의 풍성한 텍스트 속에서 오늘날 전 세계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 길어 올리는 영적 메시지는 지극히 명료하고도 웅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이 주는 모든 사방의 막힌 길과 절망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초자연적인 전진을 계속하며,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는 한 번 복음의 씨앗을 뿌려 낳은 영혼들을 결코 방치하지 않고 끊임없이 다시 찾아가 돌보는 성실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십자가의 참된 사랑은 다락방 창가에서 떨어져 싸늘하게 식어가는 가련한 생명의 절망 앞에서도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고 가슴으로 품어 안으며, 교회의 영원한 소망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한 몸 된 지체들이 서로를 책임지는 신성한 연대 안에서 끊임없이 싹을 틔웁니다.

이 거룩한 네 가지 은혜의 강줄기는 결코 각각 분리되어 따로 흐르지 않고, 복음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바다를 향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흘러갑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한 선교 비전은 영원의 세계와 온 열방이라는 먼 곳을 향해 힘차게 뻗어 나갈수록, 역설적이게도 오늘 내 곁에 있는 가난하고 상처 입은 지체들을 향한 가장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눈물의 사랑으로 수렴되었습니다. 그리고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의 대사명을 품으면 품을수록, 정작 자신의 눈앞에 있는 졸다가 떨어진 지극히 작은 한 사람의 청년에게 다가가 온 가슴으로 품어 안는 세밀한 사랑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복음은 먼 곳 열방을 향해 위대하게 전진하면서도, 동시에 내 곁에 있는 지극히 작은 한 사람의 영혼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 위대한 사랑의 역사이다.” 이 영광스러운 한 문장의 진리가, 수천 년 전 성경 속에 갇혀 있던 사도행전 20장의 먼지 묻은 사건을 오늘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거친 삶의 현실 한복판으로 생생하게 끌어당겨 놓습니다. 메말라 버린 오늘날의 교회가 세상의 거센 도전 속에서 다시금 하늘의 권능과 영적인 생명력을 회복하는 비결은, 세상의 경영학을 본뜬 기발하고 새로운 테크닉을 찾아 헤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내 곁의 영혼들을 예수의 심장으로 다시 뜨겁게 품어 안고, 고통당하는 국내외 어려운 지체들의 무거운 삶의 짐을 내 어깨로 함께 나누어 짊어지며, 거룩하신 말씀의 거울 앞에서 그동안 내 이기적인 사역과 삶 속에 존재했던 사랑의 깊은 빈틈을 발견하고 눈물로 통회하며 회개하는 자리로 돌아갈 때, 비로소 하늘의 참된 소망은 우리 가운데서 다시금 거대하게 자라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행하는 거룩한 성경 묵상의 시간은, 우리를 세상의 분주한 소음으로부터 격리시켜 하나님의 고요하고도 준엄한 질문 앞에 단독자로 세웁니다. “너는 세계 복음화라는 거대한 명분과 사명을 소리 높여 외치면서도, 정작 네 도움과 사랑을 간절히 필요로 하던 내 곁의 소외된 지체의 곁을 바쁘다는 핑계로 너무나 빨리 지나쳐 버리지 않았는가? 너는 내면의 상처와 허물로 쓰러진 낙심한 형제를 향해 ‘저 사람은 이미 늦었고 가망이 없다’라며 네 마음의 빗장을 너무 성급하게 닫아걸지는 않았는가?” 그리스도의 복음이 내딛는 거룩한 발걸음은 언제나 온 인류와 세계라는 머나먼 땅끝을 향해 웅장하게 전진하지만, 그 위대한 길의 출발점은 다름 아닌 오늘 내 눈앞에 있는 가장 보잘것없고 연약한 한 사람의 영혼을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 다시 온 가슴으로 품어 안는 바로 그 지극히 작은 자리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입니다. 오늘, 우리의 차갑게 식어버린 믿음의 발걸음은 과연 상처 입은 누구의 곁으로 다시 눈물지으며 돌아가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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