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합을 깨뜨린 사랑 – 장재형목사

  1.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과 옥합을 깨뜨린 여인에 대한 묵상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네 복음서에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으며(마 26:6-13; 막 14:3-9; 눅 7:36-50; 요 12:1-8), 특히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주간에 벌어진 일로 복음서 기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본문에 대한 묵상을 통해,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어떠한 사랑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하는지를 깊이 성찰하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먼저 마가복음 14장 3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셨습니다. 헬라어 본문에서 ‘나병환자’로 번역된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흔히 말하는 문둥병(leprosy)을 가리키는 말과 동일하게 쓰이지만, 오늘날 임상적 의미의 한센병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문둥병은 ‘부정하다’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격리되어야 한다’라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두 가지라고 말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부정’하다고 여겨지던 자와 기꺼이 식탁을 나누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나병환자는 공동체로부터 격리되고, 성전 출입은 물론 일반인들과 정상적으로 교류하기 어려운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율법적·종교적 장벽을 뛰어넘어 사람을 온전히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셨음을 드러냅니다. 장재형 목사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고, 치유하시는 모습은 곧 복음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여주는 표징”이라고 해석합니다.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며, 그 소식은 죄인과 병자와 연약한 자를 향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격리되어야 마땅한 이가 예수님의 식탁에 동참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복음의 실제 구현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시몬이라는 이름의 함축적 의미입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시몬이라는 이름은 매우 흔하긴 했지만(베드로의 본래 이름도 시몬), 마가복음에서 “나병환자 시몬”이라고 특정하여 적어 놓았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에 대해 ‘시몬’이라는 이름이 복음서 독자들에게 낯설지 않은 이름임을 상기시키면서, 베드로의 본래 이름이 또한 시몬이었음을 연결 지어 묵상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은, 한편으로 죄인이나 병자에게도 동일한 은혜가 적용된다는 복음의 원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문둥병은 당시 ‘하나님으로부터의 심판’ 혹은 ‘영적인 부정함’으로 이해되곤 했는데, 예수님께서 그런 시몬과 식사를 나누심으로써, 그를 향한 ‘완전한 용납’을 선언하신 셈이 됩니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가 모두 영적으로 문둥병자였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또한 죄와 허물로 죽었고,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부정한 자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그분의 식탁에 초대되어 함께 교제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는 구체적이고 상징적인 장소에서, 한 여인이 예수님께 나와 값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막 14:3). 이 여인에 대해 마태복음은 “한 여인”이라고 서술하고, 마가복음도 동일하게 “한 여인”이라고 언급하며, 누가복음은 “죄를 지은 한 여인”이 바리새인 시몬(동명이인 가능성) 집에서 예수님께 나와 울며 향유를 부었다고 전하고, 요한복음은 이 여인을 ‘마리아’라고 명시합니다. 복음서 저자들의 기록은 세부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핵심적으로는 “매우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 드렸다”는 동일한 사건 혹은 유사 사건을 전하면서, 그 여인의 행위가 지닌 사랑과 헌신의 의미를 깊이 부각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나드’라는 향유의 의미를 주목합니다. 나드는 히말라야 고산지대에서 채취되는 식물 뿌리에서 추출되는 고급 향유로, 당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매우 귀하고 비싼 기름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한 옥합을 사려면 삼백 데나리온이라는, 서민들이 거의 일 년간 일해야 벌 수 있는 거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향유 옥합 전체를 깨뜨려 예수님께 쏟아 부었다는 것은 그 여인이 지닌 ‘모든 것’을 드렸다는 상징적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주님 앞에서 이 여인은 가장 귀한 것을 내어놓았다. 그녀는 예수님의 임박한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분이 참된 왕이심을 직감적으로 알았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사랑이란 대가나 계산을 따지지 않습니다. 오직 ‘아낌없이 주는 행위’ 자체가 사랑의 본질임을 이 사건이 증언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여인의 행동에서 우리는 무조건적인 사랑, 혹은 ‘조건 없는 헌신’을 발견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두고 “참된 제자도는 언제나 허비처럼 보이는 사랑에서 꽃핀다”라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 여인의 행동은 매우 비합리적이고 낭비처럼 보이지만, 복음서 전체 맥락 속에서는 그 사랑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비하는 예언적이고 상징적인 행위였음을 알게 됩니다. 고대 근동 문화에서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왕이 되거나 제사장이 되는 등 아주 특별한 직무를 맡을 때 이루어지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지극한 사랑을 통해 예수님이 진정한 ‘기름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아이심을 선포하는 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7장 38절에서는 이 여인이 울며 예수님의 발에 입 맞추고,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신 뒤 자신의 머리털로 닦는 모습이 강조됩니다. 이는 죄인인 자신이 감히 예수님 앞에 설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예수님의 거룩한 사랑을 신뢰하는 믿음으로써 자신을 가장 낮추어 헌신하는 태도를 상징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여인이 흘렸던 눈물에 주목하며, 이는 죄와 연약함 속에서도 용납하시는 예수님의 긍휼에 대한 감사와, 동시에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고 경외하는 분의 죽음을 예감하는 슬픔이 뒤섞인 울음이었을 수 있다고 해석합니다.

이처럼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벌어진 옥합 파쇄 사건은, 장소 자체의 의미(부정했던 자가 치유되고 예수님과 함께 식사함)와 여인이 드러낸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가장 귀한 기름을 깨뜨려 부음)이 맞물려 예수님의 참된 메시아적 정체성과 복음의 의미를 풍성하게 보여줍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사랑의 사건이 복음 자체의 가장 중요한 특징, 즉 조건 없이 베푸는 사랑을 드러낸다고 강조합니다. 만약 우리 안에 계산하고 따지는 시선이 남아 있다면, 우리는 이 여인이 보여준 사랑을 오히려 ‘낭비’ 혹은 ‘허비’라고 판단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다’(고전 1:25)고 선언하며, 세상의 기준으로는 낭비처럼 보이는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의 지혜이자 구원의 능력임을 알려 줍니다.

결론적으로, 장재형 목사는 베다니에서 벌어진 이 사건이 “가장 낮은 곳, 가장 버림받은 자의 집에서 가장 값진 사랑이 펼쳐진 복음의 진수”라고 이야기합니다. 문둥병으로 인해 격리될 수밖에 없었던 시몬이 회복되어 주님과 식사를 나누었고, 죄인으로 여겨졌던 한 여인이 그 집에서 가장 귀한 기름을 깨뜨려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실제이며, 주님께서는 이런 사랑을 지금도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계산적이지 않고, 허비처럼 보이는, 무조건적이고 대가 없는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  제자들과 가룟 유다의 시각

한편, 복음서에서 이 옥합을 깨뜨린 사건 직후 혹은 중간에, 제자들의 반응과 가룟 유다의 배반이 언급됩니다(마 26:8-16; 막 14:4-11; 눅 22:3-6; 요12:4-6). 특히 마가복음 14장 45절에 보면, 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향해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라며 분노합니다. 마태복음 26장 8절은 이 ‘어떤 사람들’을 ‘제자들’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혔고, 요한복음 12장 45절은 이를 더욱 좁혀 가룟 유다라고 지목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바리새인 시몬이 이 사건을 곁에서 지켜보며 예수님이 진짜 선지자라면 죄 많은 여인이 자신께 다가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즉,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사랑을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낭비’ 혹은 ‘헛된 열정’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여러 모양으로 복음서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에 대해 “사랑을 진정으로 경험하지 못한 자에게는, 진실한 사랑의 행위가 때로 ‘허비’로 보일 수 있다”고 진단합니다. 제자들과 유다는 매일 예수님 곁에서 말씀을 들었고 여러 기적의 현장을 목격했지만, 그 사랑의 본질을 온전히 깨닫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특히 요한복음 12장 4~6절은 유다가 향유를 낭비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로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을 텐데!”라고 외친 것이, 실상은 돈궤를 맡고 있던 유다가 거기서 돈을 빼돌리려는 악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장면을 가리켜, “사랑의 세계로 들어오지 못한 사람이 결국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의도를 드러내는 법”이라 지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항변에 대해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막 14:6)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여인의 행위를 크게 기뻐하셨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제자들의 태도를 책망하시는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위가 자신의 죽음을 예비하는 것이요,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영원히 기념될 것이라 선언하십니다(막 14:8~9).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같은 사건, 같은 장면을 보고도 왜 누군가는 하늘의 비밀을 깨닫고, 누군가는 허비로만 보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 마음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담긴 마음을 지닌 자는 기꺼이 옥합을 깨뜨리고도 아깝지 않아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고 주님을 향한 시선이 계산적으로 바뀐 자에게는 모든 것이 낭비처럼 보이고, 그 안에서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방법만을 궁리하게 됩니다.

가룟 유다는 이 사건 이후에 ‘결정적인’ 변곡점을 맞이합니다. 복음서의 기록에 따르면, 유다는 대제사장들을 찾아가 은화 서른에 예수님을 넘겨주는 일에 대해 합의합니다(마 26:14-16; 막 14:10-11; 눅 22:3-6). 요한복음 13장 2절에서는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고 기록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게 된 계기를 깊이 묵상할 때, 바로 ‘향유 옥합 사건’이 그의 배반을 확고히 한 시발점이라고 설명합니다. 유다는 자신이 믿고 따르던 스승이 이토록 엄청난 낭비 행위를 용납하시는 모습을 보고, 더는 예수님이 자신이 꿈꾸던 ‘메시아 왕국의 길’을 걷고 있다고 믿지 않았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한마디로 유다는 “이분이 진정한 지도자라면, 이렇게 재정을 낭비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왜 허비하시는 것인가?”라는 자기 논리를 세웠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이미 물질에 대한 탐심이 싹트고 있었고, 계산적이고 합리적인 틀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과 사역을 재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의 뜻과 사랑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배반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제자들 중에서 유다는 가장 극단적으로 배반의 길을 택했지만, 사실 다른 제자들도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행동을 낭비로 보고 핀잔하였습니다(마 26:8).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반면교사가 된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알고 따른다고 해도, 여전히 사랑보다는 계산과 이익을 먼저 따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앞두고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를 다투었고(눅 22:24), 주님이 잡히시자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으며(막 14:50),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상황으로 내몰립니다(막 14:66-72). 사랑의 주님 앞에서조차 자기만의 잣대와 이익을 놓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장재형 목사가 반복해서 강조하듯 “우리 모두의 거울”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유월절 만찬이 끝난 뒤 그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한다”(요13:1 참조)고 몸소 보여주십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자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을 선뜻 표현하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한 ‘죄인 여인’은 전 재산과도 같은 옥합을 깨뜨려 주님을 기름부음으로써 죽음과 장례까지 준비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것이며, 그것이 때론 허비처럼 보여도 그것을 통해서 진정한 영광이 드러난다”는 진리를 재차 환기시킵니다. 제자들의 시선은 여전히 세상의 논리에 갇혀 있었고, 유다는 탐심에 이끌려 배반의 길을 선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그런 허물 많고 연약한 인간을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선언합니다.

따라서 장재형 목사는 제자들과 유다의 반응을 깊이 묵상하면서, “내 안에는 혹시 그러한 모습이 없는가?”를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예배 자리에 가까이 있으며, 말씀을 많이 들었다 할지라도, 그 심령 깊은 곳에 계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남아 있다면, ‘옳고 그름’을 내세우면서 진정한 사랑과 헌신을 ‘낭비’로 여길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끝에는, 가장 비극적인 형태로는 유다처럼 주님을 배반하는 자리까지 이르게 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주님을 배반하는 것은 단지 외형적인 ‘예수 팔아넘김’만을 뜻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서, 혹은 신앙생활 속에서 사랑을 허비하는 마음을 거절하고 손익계산만 내세운다면, 이미 우리 심령 안에 사랑의 주님을 배반하는 씨앗이 자라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 복음의 핵심으로서의 허비의 사랑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행위를 두고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막 14:9)고 하신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그 여인의 행위가 복음 메시지와 불가분한 관계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논리로 보면 허비요 낭비처럼 보이는 사랑이야말로 ‘복음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두고 “복음이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거룩한 낭비, 즉 독생자를 기꺼이 내어 주신 사랑”이라고 설명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내어 주셨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아낌없이 허비하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구원을 선물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허비’라는 관점은 고린도전서 1장 18절 이하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바울의 선포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세상적 가치관으로 보면 십자가는 이해 불가능하고 결코 합리적이지 않은 ‘낭비’에 가깝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굳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죄인을 위해 죽으셔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세상의 지혜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지혜’가 바로 그곳에 담겨 있다는 것이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모든 향유를 쏟아 부은 사건 역시 “주님 앞에서 낭비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만이 진정으로 복음의 깊이를 경험할 수 있다”는 상징적 메시지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단지 옛날 어느 동네에서 일어난 아름다운 장면 정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각자의 신앙과 삶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과연 얼마나 ‘전부를 드리는 사랑’이며, ‘허비처럼 보일 정도의 사랑’인지를 점검하게 만듭니다. 장재형 목사는 구체적인 예로써, 우리의 시간과 재정, 재능, 그리고 헌신의 태도를 들려줍니다. 시간을 쪼개어 예배하고 기도하며, 재정을 아낌없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며, 재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드리는 행위가 때론 주변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 적당히 하지.”라는 핀잔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그런 말을 들어도 기꺼이 주님께 드리는 자리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장재형 목사는 특별히, “우리의 예배가 형식이 되거나 습관에 그치지 않으려면, 옥합을 깨뜨리는 심정으로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올려 드리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예배 시간에 정성껏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이 누군가에게 ‘열정 과잉’으로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께 드려지는 사랑의 표현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선교와 구제에 힘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는 “왜 그렇게 많은 돈과 에너지를 들여 해외 선교를 하는가? 국내에도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데.”라고 비판할 수 있지만, 결국 복음의 본질은 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 사랑은 ‘지역’과 ‘조건’을 초월하기에, 어느 편에만 제한되지 않는 허비가 요구됩니다.

또한 장재형 목사는 옥합 파쇄 사건이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는’ 의미가 있음을 지적합니다(막 14:8). 예수님께서 곧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속죄의 제물이 되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이루실 터인데, 이 여인은 누구보다 예수님의 ‘미래’, 혹은 ‘운명’을 사랑의 마음으로 내다본 것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미래를 알게 된다”는 말처럼, 그녀는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했기에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암시를 직감했는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조차 “주여,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부인하거나(마 16:22), 십자가의 길을 모른 채 다투고 있을 때(막 10:35-45), 여인은 잔치석에 와서 옥합을 깨뜨리는 과감한 순종을 통해, 예수님의 ‘진정한 길’을 헤아려 드렸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점에서 “사랑은 영적 통찰력의 열쇠”라는 주장을 펼칩니다. 지적 이해나 신학적 지식만으로는 알 수 없는 예수님의 길을, 사랑을 통해 직감하고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오늘날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복음의 핵심이 ‘사랑의 허비’라는 사실을 놓치면, 쉽게 제자들이나 유다처럼 타산적 관점에 빠져 서로를 비난하고 분쟁에 휩싸일 수 있다고 합니다. 누가 얼마나 봉사하느냐, 헌금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 교회 활동에 열심이냐를 두고 비교하거나, 때로는 누군가의 헌신을 놓고 “왜 저렇게 과한가?”라는 불편함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선포되는 진정한 공동체라면,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아낌없이 쏟아 부은 여인을 기념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서로의 헌신과 사랑을 기뻐하며 한마음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이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복음 전파의 목적은 단지 교세 확장이나 개인의 성공이 아니라, 바로 이 ‘아낌없이 주는 사랑’을 삶으로 구현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이웃에게 복음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으셨듯이(요 12:24), 우리 또한 주님을 닮아 스스로 허비되는 결단을 내릴 때, 세상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게 되고 하나님 나라의 실제가 드러난다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이야기는 모든 복음서 저자들이 각기 다르게 기록했음에도 공통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사랑은 절대 낭비가 아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 사랑을 잃어버린 이들에게는 낭비로 보이겠지만,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허비처럼 보이는 그 사랑이야말로 생명과 구원의 원천인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본문을 인용하며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전능한 하나님이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방법을 택하신 최고의 사랑이며, 그 사랑을 받아들인 이들은 기꺼이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향유를 부어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비록 그것이 세상적 시선에는 낭비로 보일지라도, 바로 그 허비 안에 복음의 능력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결단은, 삶의 구체적인 지점에서 ‘옥합을 깨뜨리는 용기’를 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여전히 계산과 이성적 판단, 그리고 손익을 따지는 마음에서 자유롭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실제로 경험했다면, 그리고 장재형 목사가 말하듯이 “우리가 본래 영적으로 문둥병자였고 주님께서 치유해 주셨음”을 깨달았다면, 이제 주님께 우리의 옥합을 깨뜨려 드리는 것이 결코 아깝지 않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옥합이 우리의 재물일 수도 있고, 시간일 수도 있고, 재능이나 미래의 계획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자신의 자존심이나 세상의 지위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주님보다 더 귀히 여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깨뜨려’ 주님께 내어드릴 때, 그 헌신이야말로 가장 향기로운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세 번째 소주제에서 장재형 목사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복음은 ‘사랑의 허비’로 완성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며, 그 구원에 동참하는 길 역시 우리가 기꺼이 자신을 허비하는 사랑의 결단으로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바로 “주님이 나를 위해 먼저 허비해 주셨다”는 진실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장 훌륭한 옥합 파쇄의 사건이었던 셈입니다. 그분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기에, 이제 우리는 그 사랑을 알고, 또 다시 그 사랑을 주님과 이웃에게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나 병든 자에게나, 혹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때로는 나와 맞지 않는 사람에게까지도, 우리는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향유를 부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헌신은 절대로 헛되지 않고,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기억되고 기념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님께서 친히 약속하셨습니다.

이상으로 살펴본 세 소주제—(1)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과 옥합을 깨뜨린 여인에 대한 장재형 목사의 묵상, (2) 제자들과 가룟 유다의 시각에 대한 경고, (3) 복음의 핵심으로서의 허비의 사랑과 오늘날의 적용—를 통해 우리는 이 사건이 단순히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복음의 정수(精髓)를 담은 중대한 선언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옥합 사건은 곧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과, 그 사랑 앞에 우리가 어떠한 헌신을 드려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묻고 계신다. ‘너는 과연 옥합을 깰 준비가 되어 있느냐?’”라고 질문하며, 그 대답을 통해 우리가 복음의 깊이를 체험하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답은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 옥합을 깨뜨려 주셨고, 그 안에 담긴 무한한 사랑을 부어주심으로써, 우리도 기꺼이 옥합을 깨뜨릴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큰 사랑은 항상 ‘허비처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허비야말로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계산적인 제자들과 유다의 모습을 경계하면서, 동시에 베다니 문둥이 시몬처럼 치유와 용납의 은혜를 입은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옥합을 깨뜨린 여인처럼 감사와 사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 우리 삶의 가장 귀한 것들을 헌신의 예배로 바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장재형 목사가 본문을 통해 거듭 일깨우는 복음의 핵심이며, 성도가 마땅히 걸어가야 할 제자도의 길입니다. 그렇게 허비하는 사랑을 ‘미련하다’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있을지라도, 주님께서는 그 사랑을 결코 외면치 않으시며 “온 천하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함께 기억하겠다”고 약속하셨음을 붙들고, 우리 모두 옥합을 깨뜨리는 삶을 결단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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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과 용서 – 장재형목사

1.기도의 제목과 순서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주기도문에 담긴 의미를 하나씩 되새기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왜 기도해야 하고,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그는 먼저 “우리가 기도를 하는 데에는 분명한 목적과 순서가 있다”라고 강조하며, 주기도문 앞부분에서 두 가지 기도제목이 먼저 언급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 두 가지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구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이자 “우리가 사는 목적”으로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확장하는 삶이 되어야 함을 일깨워 준다. 그러나 우리는 유한하고 무지하며, 때로는 무엇을 구해야 할지도 알지 못한다. 이때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가르쳐주신 기도의 표본이자 하나의 틀이 된다.


장재형목사는 주기도문이 단순한 ‘암송기도’가 아니라, 기도하는 법을 체화하게 만드는 매우 중요한 기도라고 말한다. 즉, 많은 사람들은 기도가 무엇인지, 혹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구해야 할지를 몰라 막연하게 중언부언하거나, 일상적이고 사소한 필요만을 늘어놓다가 끝내기 쉽다. 하지만 주기도문을 올바로 이해하고 계속 묵상한다면,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한다’라는 큰 틀이 확실해지고, 그다음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양식과 여러 피로도 균형 있게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로마서 8장의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는 말씀을 인용하며,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기도 자체도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방언이나 통변 등의 은사는 그 중 하나로, 우리와 하나님의 소통을 도와주지만, 동시에 우리의 지성을 열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기도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방언이 내가 알지 못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올릴 수 있게 해주는 놀라운 은사라면, 내가 내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담아 정확히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라는 식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 19절에 “다섯 마디를 깨달은 마음으로 말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라는 구절을 예로 들며, 내가 무엇을 구하고 있으며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인식하는 기도가 더욱 유익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처럼 장재형목사는 주기도문의 오묘한 구조와 의미를 살펴보며, 첫 번째와 두 번째 기도제목인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구하는 데 이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대목까지 이미 살펴보았다고 설명한다. 그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찾는 자에게 상 주시고, 간구하는 자에게 공급해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향해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전한다. 마태복음 7장 9~10절에서 예수님께서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있겠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좋은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시기에 그분을 신뢰하며 기도하는 것이 옳다는 논리다.


그러나 여기서 기도는 단순한 소망 나열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부터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이 정말로 좋으신 분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인간이 누구에게 호의를 느낄 때는 그가 자기에게 지속적으로 선을 베풀고 있음을 경험할 때인데, 그래서 어릴 때 아이들이 가장 먼저 인식하는‘좋은 사람’의 대표가 어머니가 되듯이, 우리의 영적 차원에서도 하나님을 잘 몰라서 믿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때문에 교회 안에서든 가정 안에서든, 가장 먼저 “하나님이 정말 좋으신 분”임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노래로도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있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씻기시는 분이라는 이미지를 친숙하게 받아들이도록 돕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어 장재형목사는 예수님께 제자들이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던 장면에 주목한다. 모든 유대교 혹은 다른 종교 집단에도 나름의 기도 전통과 스타일이 있었기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제자들도 기도의 방식을 배워야 했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이야말로 우리 기도의 가장 완성된 요약본이며, 모든 기도의 골자가 들어 있다고 그는 강조한다. 주기도문 안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또 우리가 생존을 위해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자신과 타인의 죄를 용서하는 내용이 포함된다. 그리고 바로 이 “용서를 구하고 베푸는 기도”가 오늘 본문에서 다룰 핵심 주제라고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용서”가 주기도문 순서상 “일용할 양식을 구한 뒤” 이어서 나오는 것을 매우 중요한 맥락으로 설명한다. 인간이 생존하고, 양식을 공급받는 목적이 결국 용서와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도를 상징하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을 충만히 누리면, 그다음 단계로는 필연적으로 ‘남을 용서하고, 스스로도 용서받는 일’에 나서야 함을 암시한다. 주기도문은 이처럼 단계적인 구조를 지녔기에, 그저 암송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내용과 의미를 곱씹어 적용해야 한다고 그는 지속적으로 촉구한다.

그는 설교 중에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요한복음 8장)로 바로 연결해 용서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당시 율법을 들고 나온 자들이“이 여자를 돌로 쳐야 옳습니까, 말아야 옳습니까?”라며 예수님을 시험할 때, 예수님께서 잠잠히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이 땅에 쓰신 그 내용이 ‘새로운 의와 새로운 법’이었을 것이라 해석한다. 예수님은 율법을 전혀 무시하시는 분이 아니고, 오히려 율법을 완성하고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시는 분이다. 율법이 죄인에게 내리는 정죄를 한없이 유예하거나 해체해버리는 식이 아니라,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들라” 하심으로 사람들 스스로 자기 죄를 성찰하게 만드셨고, 결국 모두가 돌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떠나게 하셨다. 예수님과 그 여인만 남았을 때,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심으로 ‘그 여인을 놓아주시는(떠나보내는) 용서’를 보여주셨다. 헬라어 원어로 ‘용서’가 “떠나보내다, 풀어주다”라는 의미를 지니듯이, 예수님은 율법의 틀이 명령하는 처벌을 넘어, 뭔가 새로운 차원의 의를 선언하신 것이다.


그는 이것이 곧 주기도문에 나타난 용서의 핵심이자,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서로를 정죄하고 분노하여 돌을 들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죄를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서 이미 많은 죄를 사함 받은 내가 어찌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있겠는가” 하는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그 ‘새로운 의와 법’을 실천하기 위해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간음한 여인, 혹은 살인자, 절도자, 탐욕 많은 자들조차도 하나님은 이처럼 사랑하셨고, 예수님은 그 일을 몸소 보여주셨다. 우리가 이러한 아버지의 마음, 관용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거듭 역설한다. 그리고 이 순서가 주기도문에도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고 말한다.


또한 “죄를 범한 자를 정죄하는 일은 얼핏 공의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이 가르치는 ‘새로운 의’는 더 높은 차원의 사랑과 용서에 있다”고 강조한다. “죄인들을 무작정 봐주어서 되겠느냐?”라는 율법의 시각에서 벗어나, 율법을 초월해 그 궁극적인 목적지인‘사랑과 관용’에 이른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완성하는 모습이 예수님에게서 드러난다.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법의 근본인 “하나님의 마음”에 도달하는 길이 곧 용서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용서는 단 한 번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며, 다시 죄를 짓지 않는 삶,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는 삶의 실천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말한다.

2.율법을 넘어서는 은혜


장재형목사는 이어 “용서”의 핵심 개념과 함께 인간이 구약의 율법 안에서 살아오다가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은혜 시대로 부름받았다는 점을 부각한다. 먼저 그는 율법시대에 앞서 무법의 시대가 있었고, 그 뒤 율법이 주어지고, 지금은 은혜의 시대가 임했다고 설명한다. 율법이 생긴 목적은 죄를 죄로 깨닫게 하여 사회적 형평(equality)과 질서를 지키도록 하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21장, 레위기 24장, 신명기 19장 등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보복법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죄를 범한 만큼 그대로 돌려주어 저울이 수평을 이루게 하려는 의도였다. “법은 형평과 정의를 목적으로 하고, 그 결과 사회적 평화를 가져온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율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을 선포하신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가 네 뺨을 치거든 다른 뺨을 돌려대라. 오리를 가자 하면 십 리를 동행하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눈에는 눈”이라고 하여 정당한 보복으로 형평을 맞추는 수준보다 훨씬 높은 단계다. 주님은 “너희가 너희 의로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지만, 내가 가져온 새로운 세계, 곧 사랑과 자비, 관용이 지배하는 세계가 있다. 그 세계가 진정한 율법의 목적지다”라고 알려주신다. 그는 이 시대를 “은혜의 시대” 혹은“새하늘과 새땅”으로 비유하며, 이 시대로 들어오는 자는 이전의 보복원칙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삶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장재형목사는 구약에서 예시되는 다양한 사건들, 특히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꺼낸다. 가인이 제물 드리는 일을 두고 하나님께 화를 내었을 때,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가 화를 내면 어찌됨이냐, 죄가 문밖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으니 너는 그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경고하셨다. 결국 가인은 화를 이기지 못하고 아벨을 죽였다. 이것은 율법 이전의 무법 시대가 빚어낸 최악의 폭력적 결과이며, 동시에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가인을 찾아오시고,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며 찾아오신다. 즉, 인간이 부끄럽고 비겁하게 범죄해놓고도 서로 떠넘기는 상황을 마주하시면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향해 손을 뻗으신다.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이 왜 죄와 사탄을 그냥 두시는가?”라는 식의 신정론적 질문에 대해, “사탄이 아무리 날뛰어도 결국 예수님 앞에서 꼼짝 못한다. 예수님은 사탄에게도 ‘나오라면 나오고, 들어가라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절대 권세를 가지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고, 주님의 말씀대로 산다면 사탄은 우리를 함부로하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문제는 인간 스스로가 죄된 본성, 즉 “교만과 시기와 질투, 무책임”을 버리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죄성이 끊임없이 우리를 무법 혹은 율법의 차원에 묶어두려 하지만, 예수님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용서하고 풀어주고, 스스로의 피해를 감수함으로써라도 상대를 살려주라”는 ‘새로운 법’을 주셨다.


이처럼 용서는 결코 ‘악을 선하다고 치부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손해를 보았어도 폭력적 방식으로 되갚지 않고, 놔주고 떠나보내는 선택”이다. 이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며, 구체적으로 마태복음 18장의 “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다. 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자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않고 옥에 가두었을 때, 주인은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기는 게 마땅하지 않으냐?” 하고 책망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이 용서의 핵심이라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죄)을 탕감받은 존재이기에, 마땅히 주변 사람들에게도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어서 “내가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약속받고 아침부터 일했는데, 오후 다섯 시에 와서 거의 아무 일도 못한 자가 똑같은 품삯을 받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품꾼 비유를 언급한다. 아침부터 일한 자가 불평하자, 주인은 “네가 받을 품삯을 줄 것이라 약속했다. 네가 왜 내 선함을 악하다 하느냐?”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왜 더 늦게 온 사람에게까지 똑같은 은혜를 베푸느냐?”고 따지는, 일종의 ‘가인적 시기심’을 꾸짖는 이야기다.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인간이 재단할 수 없고, 따질 수 없는 그 무엇”이며,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엄청난 은혜’를 받았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국 “용서”라는 것은 내게 빚진 자나 내게 해를 끼친 자가 있다 해도, 그를 품고 놓아주는 차원으로 나아가라는 말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새로운 의로 드러내신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구약적 보복 개념으로 보면, 이것은 부당해 보일 수 있다. 정의란 피해자와 가해자의 차이를 정확히 가려서, 빼앗긴 것을 되찾거나 적절한 징벌을 통해 형평을 맞추는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예수님이 제시하신 길은 “우리가 모두 만 달란트 빚진 자와 같다. 그럼에도 우리를 조건 없이 용서하신 하나님을 본받아야 한다”는 메시지다. 이 메시지는 특정 순간의 ‘좋은 일’ 수준이 아니라, 주기도문을 매일 암송하고 묵상하며 우리의 뿌리와 태도를 바꿔버리는 근본적 가르침이다. 늘 누군가를 미워하고 보복하려 드는 존재였던 우리가, 이제 은혜 받은 자로서 ‘원수까지 사랑하는 길’로 부름받았다는 점이 주기도문의 “용서” 구절에 분명히 드러난다.


장재형목사는 설교 말미에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어지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대목에서 용서의 삶을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한다”라고 한다. 이 말은 공급해주시는 양식을 받아 사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 생명력으로 다른 사람을 품고, 그들을 놓아주고, 더 크게는 예수님의 ‘희생적 용서’를 따라야 함을 뜻한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시며 더욱 넓고 깊은 관용의 세계를 여셨고, “이제 그 풍요로운 세계 안에서 살아가라”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다.

3.하나님의 절대성과 사랑


마지막으로 장재형목사는 이 “새로운 법”과 “새로운 시대”가 가져다주는 영적, 신학적 의미를 구체적으로 확대해 설명한다. 그는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놀라운 기술 발전과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진정한 변화는 결국 인간의 마음과 가치관에서 시작된다”라고 말한다. 화성에 사람을 보낸다거나, 전 세계 어디서나 통신이 가능한 위성을 띄운다거나 하는 미래 기술의 이야기는 대단히 흥미롭지만, 동시에 그 어떤 기술로도 “인간의 죄성”을 바꾸지는 못한다.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되면 좋겠지만, 복음이 전해진 뒤에도 “용서와 관용의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여전히 분쟁과 시기질투, 폭력과 핍박이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복음이 증거되기를 원하시고, 이 복음 안에는 바로 ‘용서’와 ‘화목’이 핵심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하나님이 안 보인다”는 어떤 어린아이의 질문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절대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나님은 상하, 좌우, 전후 그 모든 위치를 다 볼 수 있는 절대자이시므로, 상대적 위치에 있는 우리는 그분을 직접 볼 수 없다는 논리이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존재가 아님을 나타내고,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든 하나님의 절대성은 변함없음을 뜻한다. 이어서 포스트모더니즘이나 종교 다원주의 시대에서 “절대가치란 없다”라는 식의 주장들이 늘어나지만, 사실 인간은 절대가 없으면 삶의 근본 의미를 상실하고 방황하게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믿는 이들에게는 그 절대적 기준이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분은 인간의 중심에서 우리를 붙드시는 분이다.


그렇다면 “이 절대자 하나님, 사랑이신 하나님을 우리가 진정 깨닫고 알았다면, 왜 타인을 용서하지 못하겠는가?”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지점이 “주기도문에서 용서를 구하고 실천하라는 이유”라고 역설한다. 하늘의 절대자이신 아버지가 우리에게 부어주신 사랑과 은혜를 덧입었다면, 우리 역시 같은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품어야 함을 강조한다. 아담이 하와를 탓하고, 하와는 뱀을 탓하며 죄를 전가했던 비겁함이나, 가인이 아벨의 제물을 시기한 끝에 살인에 이르는 모습은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죄의 본성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죄성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친히 오셨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요한복음 1장 29절)으로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다.


그는 또 “칼비니즘과 아르미니안주의”처럼 교리적 대립이 교회 내에서 종종 일어남을 지적하며, 로마서 14장의 원리를 들어 “강한 자도 약한 자도 서로 비판하지 말고, 형제를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이미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로 선택받은 존재이고, 동시에 나의 구원을 위해 신실하게 반응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교리상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인간의 책임”이라는 큰 틀 안에서 다루어야 한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가장 근본 진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셨고, 큰 빚을 탕감하셨으니, 우리 역시 다른 이를 용서하고 품어야 한다”는 명령이다.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품꾼 비유나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비유를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선함으로 우리를 대하신다. 우리는 은혜를 입고도 오히려 원망을 토하며 ‘왜 저 사람에게까지 똑같은 은혜를 주십니까?’라고 불평하기 쉽지만, 그것이야말로 가인적 태도이며, 주님이 말씀하신 “새로운 세계”를 거부하는 것이다.


결국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용서는 모든 신자의 삶에 있어 선택적인 항목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필수적인 실천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를 사하여 주어야 한다.” 빚진 자를 옥에 가두어 형평을 맞추는 율법적 정의가 아니라, 내가 이미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자임을 기억하는 겸손으로 더 큰 사랑을 베푸는 것이 용서의 핵심이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정의한다. 과거 율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며 보복으로 형평을 맞추는 단계를 유지했지만,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우리를 초청하신다. 이 초청을 받은 자는 하루하루 기도할 때마다 “용서”를 중요한 주제로 삼아야 하고, 나 자신부터 억울함이나 분노를 내려놓고, 주님이 보여주신 희생적 사랑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설명한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새로운 시대, 은혜의 시대”에 들어왔다고 할 때, 그것은 용서와 화목, 사랑으로 대표되는 시대를 말한다. 더 이상 나를 해친 사람에게 정당한 수준의 피해를 되갚는 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을 본받아 내가 더 많은 것을 내어줌으로써라도 상대를 살리고, 영혼을 건지려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으며,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죄인들을 향해 손을 내미셔서 회개와 회복의 길을 열어주셨다. 우리의 일상 또한 그러한 메시지를 계속적으로 되새기고, “왼뺨 맞으면 오른뺨까지 내어주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제의 삶에서 적용하는 연습장이 되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설교 전반에서 “아담과 가인 같은 비겁함과 폭력성이 여전히 인간 안에 흐르고 있으나, 예수님의 보혈과 은혜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 된 이상, 그 생각과 태도를 완전히 새롭게 해야 한다”라고 촉구한다. 한편으로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빠르고 세상이 크게 변해가는 것처럼 보여도, 인간의 마음 중심에 ‘교만과 시기, 분노와 미움’이 해결되지 않으면 결코 진정한 평화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모든 것을 “새하늘과 새땅”으로 만드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 새하늘과 새땅에서 결정적으로 구현되는 핵심 가치가 바로 용서와 사랑의 법임을 거듭 천명한다.


결국 이 땅에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법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용서해주셨듯, 너희도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어렵겠지만,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그 길을 이룰 수 있도록 도우신다. 로마서 8장의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는 말씀은, 우리가 연약할 때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는 증거이며, 주기도문 역시 성령 안에서 우리의 기도생활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근거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그 양식을 힘입어 오늘을 살아갈 수 있다면, 용서 역시 같은 기도의 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며, 우리의 필요한 양식이 공급되고, 우리가 서로를 용서함으로써 하나님과 더욱 화목하게 되는” 참된 열매를 맺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내용을 정리하며, 주기도문을 외울 때마다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 그리고 “우리의 생존”과 “서로에 대한 용서”를 거듭 묵상할 것을 권면한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목적을 확립하고, 동시에 실제 생활 속에서 원수 사랑과 관용을 체화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앙 성숙이라는 것이다. 매일 주기도문을 반복하며 “주님 오늘도 제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가 받은 사랑과 용서를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게 하소서”라는 심정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주님이 보여주신 새로운 시대, 은혜와 사랑과 용서가 충만한 시대의 일꾼이 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단순한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세상을 바라보며, 그 마음을 실천하는 데 있음을 그는 거듭 상기시킨다.


결론적으로, 주기도문의 맥락 속에서 용서는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신앙생활의 근본 과제다. 이는 율법의 잣대로 보복의 정의를 집행하기보다는, 예수님이 열어주신 더 높은 차원의 의를 따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용서를 베푸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이를 용서한다”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곧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길이며, 주기도문을 통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 일용할 양식을 구함으로 생존을 유지하는 삶”을 완성으로 이끄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리고 이는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듯, 신앙공동체가 주기도문을 수없이 암송할 때마다 그 깊은 의미를 잊지 말고, 날마다 실천해 나가야 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우주적 구원의 소망 – 장재형목사

(1)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8장 18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과 장차 임할 영광 사이의 관계를 깊이 묵상하며 해석해 왔다. 이 로마서8장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라고 선포한다. 이는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삶의 다양한 고통, 혹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시련이 결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질 미래의 영광과 동등한 무게로 견줄 수 없다는 뜻이다. 곧 이 땅에선 거두지 못할 영광과 축복이 있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신자가 천상에서 누릴 영광은 측량하기 어려운 것임을 바울은 말한다.

이렇듯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반드시 고난이 동반된다고 전제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존재로 불린 신자들의 본질이기도 하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앞면이 영광이라면 뒷면은 고난인 동전의 양면 같다”고 표현한다. 실제로 그리스도인에게 닥치는 고난은 헛된 고통이 아니다. 세상적인 기준에서 본다면 결과가 불투명하고 소망이 없으며 보상 없는 수고인 것처럼 보이지만, 믿음 안에서 우리는 장래의 하나님의 약속이 실제로 주어진 미래의 보상임을 확신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오늘 겪는 여러 시험과 아픔도,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가 된다.

바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롬 8:24)라고 선언한다. 이 문장은 문법적으로 보아도 신비롭다. “구원을 얻었다”는 과거시제와 “소망으로”라는 미래지향적 표현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동시에 그 구원의 완성은 아직 남아 있다는 긴장감이 들어 있다. 신학적으로 흔히 말하는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 사이에서 신자는 살아간다. 과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죄 사함을 얻어 의롭다 하심을 받았지만, 그 구원의 최종적 완성은 아직 미래에 남아 있고, 장차 임할 영광의 날에 완전히 드러날 것이라는 의미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이 소망을 붙잡을 때, 아무리 강력한 역풍이 불어도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며 오늘을 버텨낼 수 있다고 가르친다. 세상 눈으로 볼 때 고난과 역경은 실패와 좌절의 표지처럼 보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축복이 된다. 주님이 보여주신 길이 곧 십자가의 길이었고, 십자가 이후에는 부활의 영광이 뒤따랐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도 필연적으로 고난 뒤에 영광이 기다림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고 말씀하셨다. 이 본문은 궁극적으로 의를 위해 받는 핍박과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 된다는 예수님의 선언은, ‘의로운 행위로 받는 고난이 반드시 미래의 상급으로 보응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보상신앙’이라고 부르며, 성경이 끊임없이 약속하는 미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현재의 믿음 생활을 지탱하는 힘임을 강조한다.

바울이 가리키는 미래의 영광은 단순히 개인 영혼의 위로가 아니다. 그것은 신자가 누릴 영광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확신이다. 지금 당장 눈앞에 현실적 보상이 주어지지 않고, 심지어 믿음을 지키는 대가로 세상에서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가 있다 하더라도, 그 희생이 절대 헛되지 않음을 믿는다면 얼마든지 기쁜 마음으로 고난을 이겨낼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이 말하는 ‘비교할 수 없는 미래의 영광’을 강조함으로써, 이 세상의 가치관과 반대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신자들에게 심어주려 한다고 분석한다.

바울은 이를 단순히 개인 내면의 안위나 영적 위안 수준에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죄로 인해 고통받고 파괴된 이 우주의 모든 질서가, 결국은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회복될 것이라 확신한다. 곧 그리스도의 구원은 온 우주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며, 그 완성의 날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참된 영광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신자가 미래에 품어야 할 ‘큰 그림’이다. 지금 겪는 작은 시련과 비교할 수 없는 큰 영광이 장차 이 땅에도, 그리고 신자 개인의 삶에도 도래한다는 믿음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영광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이 땅에서의 모든 인생을 마감한다 하더라도, 천상에서 우리 주님의 풍성한 상급과 영광이 보장되어 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그리스도인이 헛된 희망에 기대어 고생만 하는 존재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신자들에게는 ‘앞으로 이루어질 확실한 소망’이 있다는 사실이 믿음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실제로 이 믿음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을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붙들었다.

바울은 단순히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을 냉혹하게 인정하되 그 너머에 있는 분명한 미래를 바라보았다. 그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우리에게 “그 영광의 보증이신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권면한다. 따라서 오늘의 삶에서 시련과 낙담이 찾아올 때, 우리는 바울의 말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을 더 굳게 붙들 수 있다. 신자는 이러한 소망의 복음 속에서, 고난 가운데도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며 믿음과 사랑, 인내를 실천할 수 있는 힘을 부여받는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말하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죽음 이후 사후 세계에서 누릴 영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 곧 우주적 통치가 완전히 회복되는 종말론적 미래가 분명히 도래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때에 불의와 죄로 인하여 훼손되고 파괴된 모든 창조세계가 본연의 질서를 되찾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 이 아름다운 미래가 ‘아직’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미’ 그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 누리며 살아간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란, 이 땅의 삶을 도피하거나 외면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오늘의 고난을 바르게 해석하며 미래의 영광을 미리 맛보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바울의 ‘미래 지향적 신앙’을 통해, 우리 삶 속에서 겪는 고난의 의미를 새롭게 조망할 것을 강조한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고난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 배치된 것임을 인식하고, 그 섭리의 최종 목적지가 영광의 회복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또한 그 영광은 단지 신자 개인의 위안이나 만족에서 그치지 않고, 모든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기다리는 보편적 구원의 완성에까지 이른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처럼 장재형목사가 제시하는 ‘현재 고난과 미래 영광의 신학’은 신자들이 절망하지 않고 결승점으로 향해 달려갈 수 있게 하는 강력한 동력이 된다.

(2) 피조물의 탄식과 우주적 구원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8장 19~23절에 나타난 ‘피조물의 고대’와 ‘탄식’을 우주적 구원(cosmic salvation)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바울은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라고 선포한다. 보통 우리 인간이 미래를 고대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여기서는 놀랍게도 ‘피조물 자체’가 구원을 간절히 바라며 기다린다는 것이다.

이 ‘고대’라는 말은 헬라어 ‘아포카라도키아(ἀποκαραδοκία)’로서, 목을 길게 빼고 간절히 기다리는 모습을 형상화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내일 소풍을 앞두고 설레는 마음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새벽이 빨리 오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것과 같다. 또한 한자(苦待)에서는 ‘고통스럽게 기다린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데, 피조물이 이처럼 고통 중에도 미래를 학수고대한다는 것은 무척 인상적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말하는 ‘피조물’이 단순히 자연 생태계나 동물 세계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타락으로 인해 함께 신음하는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창세기 3장 17절에서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라는 하나님의 선언이 있은 뒤, 타락한 인간 때문에 세상은 본연의 조화와 아름다움을 크게 잃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맡기셨던 ‘땅을 다스리라’는 명령은, 애초에 지배와 억압이 아닌 ‘섬기고 보살피라’는 청지기직의 의미였다. 그러나 죄로 인해 인간은 무분별하게 자연을 파괴하고 수탈하며, 결국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신음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롬 8:20)은, 죄의 결과로 허무해진 인간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주목하며, 원래 인간은 사랑과 자비로 자연을 돌보는 주관자(主管者)가 되어야 했는데, 타락으로 인해 폭력적이고 탐욕스러운 존재가 되었다고 말한다. 곧 참된 주인을 잃어버린 땅이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흉악한 횡포자”처럼 변해버린 인간에게 학대받고 있는 아이러니가 지금의 현실이다.

따라서 세상의 물리적, 생태적 파괴는 인간 타락의 직접적인 결과다. 하나님은 이 모습에 대해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신다”(창6:6)고 기록되었고,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라고 외치며 자신의 죄인 됨을 한탄한다. 뿐만 아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롬 8:22)고 선언한다. 이것이 죄의 보편적, 우주적 영향력이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장재형목사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단지 개인적 구원이나 내면적 평안에 국한되지 않고, 우주적 회복과 생명의 질서 회복에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울 역시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고대하는 이유를 말하면서, 결국 하나님의 아들들이야말로 땅과 자연의 “진정한 주인”임을 밝힌다(롬 8:19). 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회복될 때, 그들도 함께 누릴 미래의 ‘영광의 자유’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롬 8:21).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이 된 모든 신자를 가리킨다고 설파한다. 신자들은 단지 개인의 죄 사함을 넘어, 만물을 섬기고 가꾸어야 하는 영적 특권과 책임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아직 이 땅에서 거룩을 온전히 이루지 못한 우리가 미래의 온전한 구속을 고대하듯, 피조물 역시 그 회복의 날을 기다린다. 이는 ‘회복된 우주적 세계(cosmic salvation)’를 꿈꾸는 바울의 거대한 비전이기도 하다.

바울이 그리는 이 ‘우주적 구원’의 그랜드 피날레는 요한계시록 21장에서 보여주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과 맥이 닿아 있다.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계 21:5), 모든 눈물과 죽음과 애통을 없애시는(계 21:4) 궁극의 세계가 도래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두고, 하나님께서 타락으로 인해 깨어진 창조 질서를 한순간에 그냥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만드신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결국 우리 신자들이 희망하는 종말론은, 세상과 단절된 폐허 속에서 개인만 천국으로 들어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온 우주를 회복시키시는 포괄적인 서사이자 궁극적 혁신이라는 것이다.

이 회복된 세계를 바라보는 믿음은, 오늘 우리가 당하는 여러 가지 생태적 위기와 사회적 혼돈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게 만든다. 장재형목사는 “성경은 타락 이후 인간과 만물이 함께 신음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은 결단코 이 상태를 방관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새로운 통치를 이루실 것을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따라서 신자는 창조 세계가 신음할 때 이를 애통해하며 돌이키려 노력해야 한다. 환경 보호, 약자 보호, 사회 정의 확립과 같은 가치들 역시 결국은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길에 참여하는 실천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그 나라를 함께 누릴 주체로서 피조물도 해방을 얻는다.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롬 8:21) 더 이상 죄와 파괴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유로이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바울이 “자연의 탄식”을 말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과 함께 누릴 회복을 선포하는 이유다.

사도행전 3장 2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행 3:21)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머무신다고 표현한다. 이는 종말에는 단지 신자 개인의 구원만이 아니라, “만유가 회복되는” 광대한 하나님의 구원이 펼쳐진다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우주적 구원 사상을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압축적으로 서술했다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신자들은 결국 ‘개인 영혼의 구원’과 ‘우주적 구원’ 양쪽을 모두 직시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이 우주적 회복이라는 거대한 비전을 세상에 선포하고, 또한 그 회복의 일부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아직 이 현실에서 우리는 죄와 한계에 사로잡혀 있고, 자연 환경 파괴가 심화되며, 구조적 불의가 만연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바울이 말한 대로 “긴 밤을 지새우며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는” 그 간절한 자세로, 피조물의 탄식을 함께 느끼고 기도하며 창조 세계를 돌보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고 촉구한다. 결국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확고하기 때문에, 신자는 오늘의 수고와 헌신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알고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다.

우주적 구원은 인간의 힘으로 전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 완성된다. 그러나 그 완성을 향한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목을 빼고 기다리는” 피조물 앞에서 교회는 결코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처럼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피조물의 탄식과 우주적 구원에 대한 비전은, 신자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과 땅을 함께 아우르는’ 큰 사명을 부여한다. 하나님께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창조의 뿌리를 내리셨고, 성령을 통해 계속해서 그 실체를 드러내고 계시므로,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믿음으로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3) 성령의 도우심과 기도의 비밀

로마서 8장 2627절에서 바울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라는 놀라운 말씀을 전한다. 바울은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인지를 잘 안다. 우리는 때로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고, 또 어떤 방식으로 간구해야 하는지도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두고, 신자가 정말 의지해야 할 분은 바로 ‘중보자가 되시는 성령’이심을 강조한다.

바울은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롬 8:26)고 말한다. 이는 우리의 무지와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뜻에 온전하게 부합하는 기도를 성령께서 대신 올려주신다는 의미다. 또한 성령의 ‘탄식’은 단순히 낙담이나 슬픔이 아닌, 깊은 사랑과 열정으로 우리를 위하여 호소하는 중보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한다(딤전 2:5). 히브리서 7장 25절도 예수님이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밝힌다. 그런데 우리가 이 땅에서 기도할 때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말미암아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해주실 뿐 아니라, 성령께서도 친히 우리 마음 안에 내주하시며 우리의 기도를 고쳐주시고 이끌어주신다는 점에서, 성도는 기도에 있어 엄청난 특권을 누린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진리를 설명하면서, 신자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한다는 사실은 지극히 큰 은혜이며 결코 당연한 권리가 아니다”라고 역설한다. 원래 죄인 된 인류는 감히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었지만, 예수님이 중보자가 되셔서 휘장을 찢어 놓으셨고(히 10:1920 참조), 이제 그 길 위에서 성령께서 우리 내면 깊은 곳에 함께 거하시며 기도마저도 보조해 주신다는 것이다.

바울은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신다”(롬 8:27)고 말한다. 이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우리가 때로 엉뚱한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않은 간구를 할 때도 많지만, 성령은 그 모든 부족함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간구하신다. 결국 우리에게서 나오는 기도가 미숙하고 불완전하다 해도, 성령의 내적 탄식과 중보가 그 기도를 합당한 것으로 ‘번역’해 주신다는 것이다.

이는 곧 신자가 기도할 때 경험하는 커다란 자유와 위로다. 기도란, 내가 완벽하게 준비된 언어와 의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응답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연약함과 무지를 하나님 앞에 솔직히 내려놓고, 성령의 중보하심에 맡길 수 있는 과정이라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과 연결되는 통로’라고 표현하면서,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그 통로가 쉽게 막히거나 왜곡되기 쉽다고 지적한다.

신자가 이 사실을 인식한다면, 기도는 더 이상 ‘형식적 의무’나 ‘자기 확신을 드러내는 수단’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의 은혜에 매달리는 시간이 된다. 그것은 말씀 앞에 자신을 열고, 교만함을 내려놓으며, 간절히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구하는 태도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을 아시고, 우리가 짧은 지혜로는 발견하지 못하는 길도 예비하신다. 이렇듯 로마서 8장에 요약된 ‘성령의 중보 기도’ 교리는 신자에게 엄청난 안도감을 선사한다.

또한, 이 기도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 교회를 하나로 묶는 영적 동력이 된다.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고전 12장, 엡 4장)이라고 여러 번 가르친다. 각 지체가 서로 연결되듯이, 기도 역시 각 지체를 붙들고 세운다. 성령께서 한 지체의 연약함을 보시고 탄식하실 때, 다른 지체의 기도 속에서도 동일한 마음이 부어질 수 있다. 그럼으로써 교회가 하나 되어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하며, 서로 돌보는 성령의 공동체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성령이 우리 각 사람을 중보하면서도 동시에 교회를 한 몸으로 이끄신다는 사실은, 참된 연합의 비밀을 깨닫게 한다”고 설명한다.

바울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5)라고도 말한다.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에 대한 교훈은 이 ‘인내의 신학’과 맞닿아 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큰 그림을 갖고 계시고, 우주적 구원을 이루어가시지만, 당장 그 완전함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세상은 죄와 불의가 만연하고, 그리스도인들도 육체의 연약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교회 역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여러 혼란을 겪는다. 그렇기에 성령의 기도 도우심을 받으며, 때로는 해산의 고통을 통과하듯 인내로 맞서야 한다고 바울은 권면한다.

장재형목사 역시 우리의 영적 성장과 하나님의 나라 확장은 ‘작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리는 과정’과 같다고 말하며, 이때 꼭 필요한 것이 ‘인내’라고 설명한다. 작은 씨앗이 싹 트고 열매를 맺으려면 시간과 인내의 수고가 뒤따르듯, 교회 역시 성령의 도우심 속에 기도하며 끈기 있게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이 인내의 과정 속에서 성령은 다양한 길로 우리를 이끄시고, 우리가 스스로 깨닫지 못하던 방법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신다.

바울은 8장 후반부에서 이러한 기도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를 확장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고까지 선언한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과 모든 상황 속에서도 궁극적으로 우리를 선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인간의 시선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날 때도, 신자는 성령께서 탄식하며 중보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간구해야 한다.

결국,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도우심과 기도의 비밀’은 그리스도인이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교회 공동체가 서로를 세워주며, 나아가 우주적 구원의 비전에 동참하게 하는 핵심 동력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성령은 한없이 인격적이고도 우주적이며, 동시에 우리 심령 안에 거하시는 분”이라고 요약한다. 이 말은 곧 크고 광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도 성령을 통해 실현되며, 작은 개인의 미약한 기도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합당한 응답을 받는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로마서 8장 전체에서 바울은 신자가 현재 겪는 고난, 우주적 구원,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에 대해 굳건히 증거한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는 믿음이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담대한 소망을 심어주며,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는 비전이 이 믿음을 개인 구원을 넘어 모든 창조 질서의 회복으로 확장한다. 그리고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는 선언은,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성령의 능동적 중재가 있음을 알려주어 우리를 안심케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을 현대 교회와 성도의 삶에 재적용함으로써, 세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해 왔다. 첫째, 믿음의 길에는 반드시 고난이 동반되며 그것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는 점. 둘째, 죄로 인해 깨어진 우주적 질서가 결국 하나님의 손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거시적 안목. 셋째, 이 모든 구원의 과정에서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돕고, 결국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도록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이다.

이 세 메시지는 신자가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며 참음으로 기다릴” 수 있게 하는 신학적 토대가 된다. 또한 교회는 오직 이 소망 위에서 서로를 섬기고, 세상의 아픔과 탄식을 함께 짊어지며, 미래의 영광에 대한 확신으로 오늘을 살아낸다. 이 과정에서 때로 실패나 좌절을 경험하더라도,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기도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경건의 훈련을 지속하게 된다.

결국, 로마서 8장은 바울의 구원론이 그 정점을 이루는 장이자, 장재형목사가 강조해 온 신학적 주제인 ‘우주적 구원’과 ‘성령의 역동성’을 통합적으로 보여주는 핵심 통로이다. 고통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이들에게, 미래의 영광과 우주적 회복의 비전이 위로와 힘이 된다. 또한 기도가 막히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어 답답해하는 이들에게,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이 곧 신자의 연약함을 돌보는 능력임이 선명히 드러난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로마서 8장의 메시지를 두고, “믿음의 사람은 이미 ‘어둠을 뚫고 밝아오는 새벽’을 미리 보는 사람이다”라고 평한다. 그리고 그 새벽의 빛은, 현재의 고난을 능히 감당하게 해주고, 함께 고통당하는 피조세계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마땅히 기도할 바를 깨닫도록 이끌어 주는 성령의 조명이다. 이 성령의 조명 아래, 신자는 오늘의 가시밭길에서도 내일 피어날 꽃을 기대하며 전진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로마서 8장에 요약된 바울의 가르침은 현재 교회가 세상 속에서 가져야 할 구체적 태도에 대한 지침을 준다. 세상의 흐름이 혼돈과 절망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리스도인은 이미 마음속에 ‘비교할 수 없는 미래의 영광’을 담아두고 있다. 환경 파괴와 생명 경시 사상이 만연해도, 우리는 ‘피조물의 탄식’을 들으며 우주적 구원을 향해 협력할 수 있다. 또 온갖 경제적, 사회적 위기에 떠밀려 기도를 멈추고 싶은 순간이 와도,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을 믿고 다시 무릎을 꿇는다.

이처럼 장재형목사가 해석하는 로마서 8장은, 교회와 성도가 나아갈 길을 세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어떤 고난도 미래 영광과 비교해 낙심하지 말 것. 둘째, 나와 무관해 보이는 자연과 사회의 고통 앞에서도 보편적 구원 비전을 가지고 실천할 것. 셋째, 우리의 기도와 삶을 성령의 도우심에 굴복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매일 구하며 순종할 것. 이것들이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사명’이며, 끝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통로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핵심이자, 사도행전의 결론이며(행 28:31), 로마서 8장이 가리키는 최종 목적지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눈이 세상의 불확실함에만 고정되면 쉽게 좌절하겠지만, 하나님의 주권과 역사의 궁극적 수렴점을 바라보는 신앙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결국, 로마서 8장 18-27절에 담긴 내용은 바울의 복음 신학에서 핵심적인 주제를 이룬다. 그리고 장재형목사의 해설에 따르면, 이 본문이 말하는 ‘현재 고난과 미래 영광’, ‘피조물의 탄식과 우주적 구원’, ‘성령의 도우심과 기도의 비밀’은 따로 떼어 놓고 볼 수 없는 유기적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다. 오늘의 고난이 허무하지 않음은 우주적 구원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이며, 이 믿음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간구와 기도가 필수적이라는 논리적 흐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전체에서 먼저 사람의 죄와 의로움, 율법과 복음의 문제를 깊이 다룬 뒤, 8장에 이르러 구원의 놀라운 결말과 성령의 능력을 찬양한다. 이는 구약의 결론이 예수 그리스도이듯, 신약의 결론이 ‘하나님의 나라’임을 보여주는 흐름과 일치한다. 장재형목사는 그 완전한 구원에 대한 비전을 회복해야만, 교회가 세상을 향해 제대로 된 복음을 선포할 수 있고, 신자들 역시 세속적 가치에 흔들리지 않으며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한편, 우주적 구원은 결코 막연한 이상이 아니다. 바울은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는 부활의 완성,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광스러운 통치를 언급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성경이 제시하는 종말론은 절망의 종말론이 아니라 희망의 종말론”이라고 가르친다. 세상 종교나 세속 이념들의 종말론이 대개 파국적 멸망이나 인간 자체의 힘으로 만드는 불완전한 유토피아를 말하는 것과 달리, 성경은 만물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적극적 구원 행위를 선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종말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종말을 기대하며 오늘을 성실히 사는 사람이다. 이는 로마서 8장에서 말하는 소망의 기초이며, 성령 안에서 그 소망을 현실로 가져오기 위해 수고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장재형목사는 “보이지 않는 소망을 바라보면서 참는 자가 결국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할 것”이라는 바울의 말을 인용하며, 우리 시대의 교회가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창조 세계의 탄식을 회피하지 말며, 기도를 포기하지 말 것을 거듭 호소한다.

마지막으로,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8장 24절 말씀인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라는 구절이 신자들의 실제 삶에 주는 의미를 강조한다. 보이는 현실이 아무리 참혹해도, 신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더 실재하는 것처럼 바라볼 수 있다. 왜냐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이기 때문이다. 이 ‘보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신자가 설 수 있는 확고한 터전이다.

결국 우리가 “이미 얻었다”고 선언하는 구원은, 실제로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구원’이기에, 지금도 세상을 뒤흔드는 죄와 불의의 세력 사이에서 영적 전투가 일어난다. 피조물은 신음하고, 교회는 때로 내부 갈등과 외부 핍박으로 힘겨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의 최종 결과가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 안에서 승리로 결정되었다는 사실이야말로 바울이 선포하는 복된 소식이다.

신자는 그 승리가 완전하게 현실화될 종말을 바라보며, 오늘을 성실히 살아가는 ‘순례자’다. 그리고 그 길을 가는 동안, 장재형목사가 누누이 강조하듯, 홀로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와 중보 기도를 힘입는다. 성령은 우리의 나약함을 긍휼히 여기시고, 불완전한 기도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바꾸며, 우주적 구원 비전에 동참하도록 날마다 격려한다.

이처럼 로마서 8장에 나타난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 피조물의 탄식과 우주적 구원, 성령의 도우심과 기도의 비밀’이라는 세 가지 축은, 장재형목사가 풀어내는 신학적 메시지의 핵심이다. 첫째, 현재의 고난 속에 살지만 장차 임할 영광을 보고 담대하라. 둘째, 피조물의 신음이 무의미하지 않으니 우주적 구원을 향해 함께 전진하라. 셋째, 성령께 기도의 무거운 짐을 맡기고, 그분의 탄식하심과 중보하심을 신뢰하며 기도하라.

이 세 소주제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소망, 그리고 매일의 경건 생활이 어떻게 하나로 연결되는지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로마서 8장은 개인 구원에서 끝나지 않고 우주의 종말론적 회복을 제시하며, 그 한가운데에서 성령의 내주하심을 강조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이 얼마나 과격하고 혁명적인 메시지인가. 성경이 선포되는 곳에는 결코 현상 유지와 고착화가 있을 수 없다”고 언급한다. 실제로 복음이 들어간 지역과 세대마다, 우상 숭배와 불의가 타파되고 교회가 세워진 역사가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 8장 18- 27절은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신자를 거룩한 소망으로 이끄는 힘이 있다. 그리고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해설하며,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고난을 해석하고, 어떻게 피조세계의 아픔에 참여하며, 어떻게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해야 하는지를 실천적 과제로 제시한다. 만일 신자들이 이 메시지를 참되게 붙들고 산다면, 어느 상황에서도 절망에 매몰되지 않고, 오히려 소망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결국 오는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거듭 강조하는 바와 같이, 이 모든 구원의 과정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내거나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이지(빌 4:13), 우리 인간의 힘으로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우주적 구원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겸손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성령의 도우심에 의존하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고대하는 사람이다.

이와 같은 로마서 8장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교회가 세상 가운데 빛과 소금이 되도록 촉구한다. 흔히 세상이 교회에 기대하는 ‘사회 참여’나 ‘윤리적 책임’은, 바울이 말한 우주적 구원과 분리되지 않는다. 창조 세계가 신음하는 소리를 듣고, 그 회복을 위해 기도하며, 작은 것이라도 실천하는 교회야말로‘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징표가 될 것이다. 장차 올 영광의 나라를 지금 부분적으로나마 드러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의 메시지를 묵상할 때, 우리는 깊은 위로와 함께 무거운 책임감을 동시에 느낀다. 책임감이라 함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정을 돌보고, 이웃을 사랑하며,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불의한 제도를 개선하는 등,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가져오는 다양한 방식의 참여를 뜻한다. 동시에 위로라 함은, 우리가 지치고 실패할 때도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도우시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이다.

결국, 로마서 8장 18- 27절은 기독교가 단지 영적 위로에 그치는 개인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는 강력한 종말론적 신앙이자, 우주적 차원의 구원을 지향하는 보편적 복음임을 웅변한다. 그리고 이 신앙을 구체적으로 적용하도록 안내하는 것이 바로 장재형목사의 해설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를 통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라는 말씀에 담긴 복음을 오늘의 자리에서 체화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에 더해, 우주적 회복이라는 담대한 미래가 예언되어 있으니, 신자가 지금의 삶 속에서 능동적이고도 긍정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현상 세계가 죄로 왜곡된 것이 사실이고, 다양한 고통과 모순이 여전하지만,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그것이 ‘소망’이며, 오늘의 실천과 기도를 견인하는 동력이다. 만약 이 소망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세속적 절망이나 허무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로마서 8장 18- 27절이 가르치는 핵심 주제 세 가지를 다시 살펴보자. 첫째, “현재의 고난은 장차 임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는 선언을 통해, 고난을 영적으로 해석하고 그 너머를 바라보는 신앙 자세를 배운다. 둘째,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 창조 세계 전체가 함께 회복될 우주적 구원을 소망하며, 교회가 그 회복의 통로가 되도록 부름받았음을 깨닫는다. 셋째,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의 한계를 초월해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도록 도우시는 성령의 역할을 체험하게 된다.

이 세 소주제는 상호 보완적이면서도, 한 궤를 이룬다. 고난의 해석은 미래 영광의 비전 속에서 이루어지고, 우주적 구원의 큰 그림이 없이는 현재의 고난이 자칫 자기연민이나 무기력으로 빠질 위험이 있지만, 이 그림을 알면 교회가 세상을 섬기는 동기가 생긴다. 그리고 결국 이를 현실화하고 이뤄가는 실제적인 힘은 성령의 도우심과 기도에서 나온다. 그 기도 안에서 신자는 새로운 용기와 지혜, 그리고 구체적인 실행 의지를 얻게 된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보증하는” 성령의 임재에서 비롯된다. 바울이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롬 8:23)라고 부르는 성령의 내주(內住)는,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확증해 주는 가장 분명한 증거다. 그 증거 아래에서 우리는 ‘양자 된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 우리의 몸, 곧 우리의 전 인격과 교회 전체가 완전히 구속되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영광스러운 형태로 변화될 날을 소망한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부분이 현재 교회의 중요 과제라 말한다. 신자 각자가 성령의 손길 속에서 점점 변화되며, 나아가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선을 실천해나가는 것이다.

이렇듯 로마서 8장 18- 27절은 바울 신학의 정수 중 하나다. 장재형목사가 꾸준히 가르쳐온 대로, 고난이 있는 자리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올리고, 피조물의 탄식 앞에서는 하나님의 큰 그림을 바라보고, 기도할 때마다 성령의 중보하심에 의지해야 한다. 이 원리대로 살 때, 교회는 “역사를 변화시키는 급진적(radical) 공동체”가 될 수 있으며, 개인은 ‘구속의 은혜’를 일상에서 실현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로마서 8장의 이 메시지를 붙잡는다면, “오늘의 아픔”이 “내일의 소망”을 향한 통로가 된다. 피조물이 신음하는 것을 보며 ‘아직 멀었다’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고 함께 탄식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창조 세계의 회복에 참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 성령께서 우리의 약함을 돕고 계시므로,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우리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영광의 궁극적 완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선명해진다”라고 말하며, 이 영광을 바라보는 교회가 이 땅의 절망과 한계를 뛰어넘어 세상을 섬기는 구체적 행위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전망이 이 땅의 구체적 문제와 동떨어진 미래 환상으로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현재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능력이 오직 성령의 도우심과 탄식 어린 기도를 통해 가능함을 로마서 8장을 통해 분명히 배운다.

결국, 이 모든 내용을 종합하면, 바울이 말하는 ‘현재의 고난’은 우연적이고 무의미한 일이 아니며, ‘장차 받을 영광’ 또한 막연한 관념이 아니다. 피조물의 탄식과 우주적 구원은 우주와 우리 모두가 함께 갈망하는 미래이고, 그 실현을 위해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도우신다. 이러한 삼중의 메시지 안에서 신자는 ‘이미’ 얻은 구원의 기쁨과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구원에 대한 열망을 품고 살아간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이 메시지를 세상에 제대로 전한다면, 사람들은 절망과 무기력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고통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증대되는 시대일수록, ‘바로 그 고난 한가운데서 피어나는 영광’이라는 역설의 복음이야말로 절실히 필요한 소식이다. 우리가 이 복음을 붙들고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통해 역사하시며, 종말에 이루실 우주적 구원의 전조를 이 땅에서 조금씩 실현하게 하신다.

이처럼 로마서 8장 18-27절의 풍성한 내용은 단지 옛 문헌에 담긴 사도 바울의 교훈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통해 고난에 대한 책임 있는 태도, 피조물과 함께하는 연대, 그리고 성령을 의지하는 기도의 삶을 끊임없이 설파해 왔다. 그 결과 개인 신앙과 교회 공동체, 그리고 사회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아들들”이 드러나는 길을 모색해 왔다.

종국적으로, 바울이 바라보는 구원의 시야는 개인 구원을 넘어 온 우주적 영역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가는 데 필요한 힘은 성령께서 공급하신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라는 선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이 아무리 복잡하고 고달프다 해도, 장재형목사가 말하듯 우리는 이미 ‘비교할 수 없는 미래의 영광’에 참여할 것임을 믿기에, 오늘 또 한 발 내딛을 수 있다. 그 믿음이 있는 한, 우리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통로가 되며, 피조물의 탄식 역시 언젠가 끝나고 기쁨의 찬양으로 바뀔 것이다. 그리고 이 놀라운 전환을 위한 중요한 열쇠가 바로 ‘성령의 도우심에 의지한 기도’다.

이것이 로마서 8장 18절부터 27절까지에 대한 장재형목사의 해석이 제시하는 최종적 비전이다. 신자는 오늘의 현실에 매몰되지 않으며, 우주적 구원을 꿈꾸며, 성령 안에서 기도의 자리를 지킨다. 그리고 이 삼중의 태도가 결코 낭만적 환상이나 수동적 체념으로 흐르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섬기고 바꾸는 동력이 됨을 우리는 교회사와 신앙의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 피조물의 탄식과 우주적 구원,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과 기도의 비밀이 삼위일체적 구원의 전망 안에서 통합적으로 빛난다는 것이, 바로 로마서 8장 18-27절이 우리에게 주는 복된 소식이다.

구원과 성도의 삶 – 장재형목사

1.구원 경륜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구원 이해의 핵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적 경륜에서 시작된다. 창세 전에 이미 예정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의도가 구약 시대부터 신약 시대, 그리고 오늘날 교회 시대를 관통하여 성취되고 있다는 통찰은, 단순히 교리적으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인간의 죄로 인해 깨어지고 파괴된 세상을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움직임은 우연이나 돌발적 결정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품어오신 계획의 표출이다. 이 구원 경륜을 이해하면, 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사건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구약의 율법과 제사 제도,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모두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밑그림과 예표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이미 하나님은 열방을 복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고, 율법을 통해서는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셨으며, 선지자들의 예언은 메시아가 오실 것을 쉼 없이 외쳤다. 결국 이 모든 예표와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본격적으로 실현되었다는 점에 장재형목사는 주목한다. 예수님이 단순히 유대교 내의 한 선지자나 교사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한 구원의 길을 여신 참된 메시야라는 사실은, 구원의 경륜이 인간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에서 비롯됨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표라는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가리켜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었던 구원 계획이 시간과 공간 안으로 들어온 전환점”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 자체가 기적 중의 기적이며, 이는 인간 이성으로 쉽사리 납득할 수 없는 사건이다. 그렇지만 이 성육신이 없이는 구원이 실제로 가능한가를 생각해 보면, 성육신이야말로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치임을 깨닫게 된다. 인간이 죄를 지었으므로, 죄값을 치르는 당사자는 근본적으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동시에 그 형벌을 이겨내고 죄를 해결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예수님이 곧 사람이자 하나님이신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장재형목사가 끊임없이 설파하는 복음 이해의 토대다.

그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 전반, 곧 병자 치유, 말씀 선포, 제자 훈련, 그리고 십자가의 길까지 모든 과정이 “구원 경륜의 구체화”라고 본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이나 가르침은 단순한 종교적 카리스마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임했음을 시각적으로, 체험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모든 기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죄와 질병, 죽음의 권세를 초월한다는 선언이며,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신 사랑과 용서는 메시아적 왕권의 일면을 드러낸다. 무엇보다도 이 사역의 절정은 십자가다. 장재형목사는 “십자가 없이는 구원이 완성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반드시 누군가가 대신 죽어야 죄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구약 시대의 제사 제도는 짐승을 잡아 피 흘림으로 죄를 덮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흠 없는 대속 제물로 자기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온 인류의 죄를 영원히 청산하신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십자가 사건을 다양한 각도에서 해설한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충돌하는 듯 보이지만, 그 두 가지 속성이 십자가 안에서 완벽히 조화된다. 죄에 대한 대가가 치러져야 하는 공의가 있고, 동시에 죄인을 살리려는 사랑이 있다. 예수님의 희생은 공의를 만족시키는 동시에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최대치로 표현한다. 여기서 신자는 “아무런 공로 없이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에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매우 강조하면서, 교회가 복음을 전할 때 먼저 이 십자가의 사랑과 공의를 선명히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지 않고 윤리나 신학 이론을 앞세운다면, 복음의 핵심이 흐려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모든 대속적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거한다. 만약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고 그걸로 끝났다면,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극적 순교사로 기억될 뿐이다. 그러나 부활을 통해 죄와 사망의 권세가 무너졌음이 확정되었다. 이 부활 사건은 구원의 완성을 선언하며, 동시에 신자들에게도 “부활 생명”에 참여하는 소망을 준다. 장재형목사에 따르면 부활은 “신앙의 분기점”이다. 부활이 사실이기에 기독교 신앙은 현실적 힘을 얻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기에, 그분을 믿는 자들도 죽음 뒤에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고, 지금 이 순간에도 죄의 권세에서 자유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사역은 장재형목사의 시각에서 보면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현실 세계 안에서 전개된 사건”이다. 성육신, 공생애, 십자가, 부활, 승천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은, 구약 시대부터 예표된 메시아적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선언한다. 이 구원의 핵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신자는 죄 사함과 자녀 됨의 권세를 얻는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구원이 멈추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구원은 단회적 사건이면서 동시에 과정이다. 의롭다 함을 받은 다음에는 성화와 제자도의 길이 열리며, 그것을 실제로 가능케 하는 분이 바로 성령이다. 예수님의 땅위 사역이 구원을 “열어 놓은” 것이라면, 성령의 시대는 그 구원을 “체화”하는 국면이다. 이 부분이 계속되는 논의에서 핵심이 된다.

2.성령 시대와 성도의 성장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이후, 교회 역사에 나타난 가장 큰 전환점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단지 교회 출발의 한 장면이나 사도들의 체험으로 축소해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구원 경륜이 예수 안에서 정점에 달했다면, 오순절을 기점으로 그 구원이 널리 확산되고 깊이 있게 적용되는 시기가 열렸다고 본다. 예수가 죄 문제를 해결하셨고 죽음을 이기셨다면, 이제 그 구원의 열매가 모든 믿는 자에게 실제가 되어야 하는데, 그 중심에 성령의 사역이 위치한다.

성령 시대에서 핵심은 “보혜사”라는 명칭에 담긴 의미다. 요한복음 16장에서 예수께서는 성령을 보혜사, 즉 다른 말로는 “도우시는 분, 변호자, 위로자” 등으로 소개하신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더 나아가 성령은 단지 위로하고 돕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과 신자의 내면을 책망하고 각성시키며, 신자를 성화의 길로 이끌어가는 분이라고 강조한다. 예수님이 이미 죄를 짊어지셨으므로, 성령은 이제 그 죄의 본질을 드러내고 예수의 의를 믿도록 하는 데 적극 관여한다. 세상 임금인 사탄은 이미 패배했으므로, 성령은 믿는 이들로 하여금 이 사실을 확신케 하여 담대히 살아가도록 돕는다.

장재형목사는 “성령 내주” 개념을 자주 언급한다. 예수를 구조로 영접하면, 성령께서 그 심령 안에 거하심으로써 신자가 더 이상 고아처럼 방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신자 안에 있는 성령이 말씀을 깨닫게 하고, 죄를 미워하게 하며, 거룩을 사모하게 만든다. 이것은 단지 교리적 차원이 아니라, 실제 체험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장재형목사는 오래된 선교 경험을 통해, 복음을 처음 듣고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성령의 내주를 경험하는 과정을 여러 번 지켜봤다고 말한다. 그때 사람들은 이전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삶을 재정비하고, 기쁨과 확신, 자유를 누리게 된다. 이 변화는 곧 성령의 능력을 반영한다.

성령이 단지 내면적 은혜만 주는 것이 아니라, 신자를 공동체 생활로 이끄는 점도 장재형목사는 주목한다. 초대교회 역사를 보면, 오순절 이후 사도들이 성령 충만함을 입어 담대히 복음을 전했고, 교회는 사랑과 나눔으로 가득한 공동체가 되었다. 이는 성령이 공동체적 성격을 띠신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신자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를 때, 교회는 단지 개인 경건의 총합이 아니라, 살아 있고 호흡하는 신앙 공동체가 된다. 교회는 성령의 역동을 통해 한 몸을 이루고, 다양한 은사들이 발현되며, 상호 보완적으로 사역을 수행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교회 공동체가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고 섬기는 데 있어 필수적 통로라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개념이 바로 “성화”다. 구원은 단회적 칭의(의롭다 하심)와 그 이후 평생에 걸친 성화로 구성되는데, 성화는 신자가 하나님의 형상을 조금씩 회복해 가는 과정이다. 장재형목사는 성화가 개인 노력만으로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죄성과 연약함을 지닌 존재이므로, 성령이 도와주지 않으면 결코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 성령은 죄가 무엇인지 분명히 지적하고, 그 죄를 내면에서 물리칠 수 있는 힘을 공급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말씀 묵상과 기도의 자리로 초청하고, 사랑과 섬김을 실천할 수 있게 부추긴다.

여기서 성령의 열매(갈라디아서 5장)나 은사(고린도전서 12장 등) 개념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같은 덕목들이 신자의 성품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고, 은사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특정 신자들에게 주시는 다양한 능력이다. 장재형목사는 성령의 열매와 은사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은사가 충만하더라도 열매가 없다면, 그 은사는 교회 내에서 분쟁을 일으키거나 남용될 위험이 있다. 반면 열매만 강조하고 은사를 완전히 무시한다면, 교회가 가진 영적 역동성이 약해질 수 있다. 성령 안에서 둘 다 고루 작용할 때, 교회 공동체와 신자 개인의 삶이 풍성해진다는 것이 그의 관점이다.

성령 시대의 또 다른 열매는 “선교와 전도의 동력”이다. 예수님의 지상명령(마태복음 28장)에 따라, 교회는 복음을 만민에게 전해야 할 책무가 있다. 문제는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선교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장재형목사는 전도가 영적 전쟁의 영역이기도 하므로, 성령의 능력 없이는 지속적 열매를 거두기 어렵다고 말한다. 성령이 신자들에게 담대함과 지혜를 주어, 사람들의 영혼을 향해 복음을 선포하게 만들고, 필요한 언어와 문화적 장벽도 넘게 하신다. 이는 초대교회가 로마 제국 전역으로 복음을 확장하던 과정에서도 분명히 나타난 패턴이다. 따라서 교회가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선교적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고, 신자도 성령의 음성을 좇아 자기 삶의 자리에서 복음을 증거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성도들이 성령을 소멸하거나 근심케 하면 안 된다”는 성경 구절을 자주 인용한다. 성령은 영이시지만, 실제 인격이기도 하므로, 공동체나 개인이 불순종과 죄로 가득 차면 성령의 활동이 제약된다. 반면 성령께 자발적으로 순종하고 마음 문을 열면, 더 큰 은혜가 임하고 변화가 일어난다. 결국 성령 시대의 신앙생활이란, 구원받은 성도가 날마다 성령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그분의 힘으로 죄를 이기며 선을 행하고, 예수를 높이며 사는 것이다. 교회도 이 원리에 따라 움직일 때, 세상에 강력한 복음 증거자로 설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 과정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열린 구원을, 성령을 통해 매일 실제화하는 여정”이라고 표현한다.

이렇듯 성령 시대는 신자들에게 큰 특권이자 책임이다. 특권이라 함은, 성령께서 신자 한 사람 한 사람과 동행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것을 구현할 능력을 주신다는 점이다. 책임이라 함은,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무시하거나 죄에 굴복하지 말고, 거룩을 추구하며 선교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복음이 단순히 과거 예수님의 사건만을 기념하는 종교가 되지 않도록, 교회가 성령 안에서 현재진행형의 구원을 실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바로 여기에 교회의 생명력이 달려 있고, 신자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다.

3. 종말론적 희망과 교회 공동체

장재형목사의 신학적 가르침은 구원 경륜과 성령 시대를 설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그 최종 목표는 역사와 우주의 완성 지점, 곧 종말에 대한 희망을 통해 더욱 선명해진다. 그는 구원이 개인의 죄 사함에서 시작해 성령 안에서 성화로 이어진다면, 결국 모든 역사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임하게 될 것을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종말론적 희망은 신자와 교회가 세상을 대하는 관점을 바꾸어놓는다.

요한복음 16장 마지막에서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었다”고 선포하신 대목은, 이미 십자가와 부활로 사탄이 패배했음을 알려주는 대표적 말씀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에 큰 비중을 두며, 신자들이 고난과 역경을 겪을 때, 단지 위로 차원이 아니라 실질적 승리의 확신을 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교회와 성도에게 전가되는 것은 미래의 어떤 막연한 일이 아니라, 이미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서 확보된 사실이다. 다만 우리 시각에서는 아직 세상에 죄와 불의가 남아 있고, 사탄이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최종적인 완전한 통치가 실현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종말론적 희망이 교회의 사명에도 직결된다고 말한다. 교회는 단지 과거 복음을 보관하는 ‘역사 박물관’이 아니라, 미래 하나님 나라를 예고하고 보여주는 ‘시연장’ 역할을 한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랑과 정의가 실천될 때, 사람들은 잠시나마 하나님의 미래 통치를 맛보게 된다. 교회가 과오를 범하고 인간적 문제가 드러날 때도 많지만, 본질적으로는 성령께서 교회를 통해 세상에 희망을 전하신다는 게 장재형목사의 신학적 시각이다. 즉, 교회가 이 땅의 현실에 굴복해 타협만 해서는 안 되며, 종말론적 시각을 견지하여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종말론적 희망은 또한 신자 개인에게 살아가는 용기와 견인불발의 태도를 제공한다. 세상의 가치가 악해 보이고, 불의가 번성하며, 여러 고난이 덮쳐와도, 최후의 결말은 하나님 편에 있다. 이것을 믿을 때, 신자는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하게 선을 행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역사의 주도권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는 확신이라고 표현한다. 눈에 보기에 대단히 혼란스럽고 승산 없어 보이는 상황이라도, 주님이 결국 승리를 선포하실 날이 온다. 교회는 이 사실을 설교와 교육, 제자훈련을 통해 신자들에게 각인시키면서, 사회적 봉사와 선교, 정의 실천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비유 중 하나는 “교회는 하나님의 대사관”이라는 것이다. 대사관이란, 어떤 나라가 외국에 세우는 자치 구역으로, 그곳은 법적으로 본국의 일부처럼 간주된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이 세상이라는 타국에 설치된 하나님 나라의 공식 대표부이며, 그곳에서 하나님의 법과 질서를 미리 맛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예고한다. 종말이 올 때 이 대사관이 본국으로 확장되어 갈 것이지만, 그전까지 대사관은 타국에 존재하면서도 본국의 가치를 지키고 전파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개념을 통해,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면서도 세상 속에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하는 당위성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한다.

구체적인 실천 방향으로, 그는 두 가지 축을 제안한다. 하나는 복음 전파, 다른 하나는 사랑과 정의 실천이다. 복음 전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세상에 선포하는 일이며, 사랑과 정의 실천은 교회가 하나님의 통치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통로가 된다. 어떤 교회들은 복음을 영혼구원으로만 국한시켜, 사회적 책임을 게을리할 수 있다. 반면, 사회 참여에만 치우쳐 복음 선포의 열정을 잃어버리면, 교회의 정체성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종말론적 균형감각을 갖추면, 이 두 가지가 조화롭게 작동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 나라는 영혼을 살리며, 또한 세상에 사랑과 정의의 흔적을 남긴다.

종말론적 희망은 개인의 죽음과 부활 희망과도 연결된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니 신자도 부활에 참여할 것이라는 믿음은, 신자의 삶 전체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인식이 생기면, 삶의 목적과 가치가 세속적 성공에 매이지 않고 영원한 관점으로 확장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성도는 이 땅에서 낯선 순례자이며, 궁극적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식으로 표현한다. 이 말은 세상일을 소홀히 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섬기고, 타인에게 복음을 전하며, 개인 영혼의 성화에 매진하라는 동기가 된다.

결과적으로 종말론적 희망을 가진 교회 공동체는 좌절이나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설사 세속적인 기준으로 볼 때 교회가 미약해 보이거나, 신자 개인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어도, 역사의 최후 심판과 하나님 나라 완성을 향한 기대가 있기에 흔들리지 않는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교회가 세상에 제시할 수 있는 독보적 가치라고 말한다. 세상은 늘 빠른 성과, 눈에 보이는 성공을 추구하지만, 교회는 “하나님이 최종 심판주가 되시고, 우리의 보상은 하늘에 쌓인다”는 논리를 기반으로 움직일 수 있다. 결국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서 이 종말론적 비전을 공유하면, 교회는 서로 격려하고 세상에 희망을 전달하는 사명을 완수하게 된다.

이러한 종말론적 이해는 구원의 전체적 구조에서 마침표가 아니다. 오히려 현재 우리 삶을 끊임없이 해석하고 이끄는 지속적 모티브가 된다. 구약에서 시작된 메시아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로 이어졌고, 성령 시대를 통해 교회와 성도가 그 열매를 맺으며, 마지막 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거대한 내러티브를 한 덩어리로 제시함으로써, 신자들이 교회를 일상적 의무감으로 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우주적 계획에 참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종말론적 희망은 교회와 성도의 정체성을 현저히 높이고, 삶의 방향을 미래에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세상의 끝이 곧 하나님의 새로운 시작”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우리가 육체적 생을 마감하거나, 역사의 종말이 올 때, 그 끝은 곧 영원한 통치가 전면화되는 순간이 된다. 그러므로 신자가 절망하거나 체념할 이유는 전혀 없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문제들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결국 선용될 것이며, 교회는 구원받은 자들의 공동체로서 영원 속에서 더욱 빛날 것이다.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일관되게 제시하는 종말론적 믿음의 핵심이다.

장재형목사가 전하고자 하는 복음은 단순히 과거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고 부활하셨다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 사건이 시작점이라면, 성령 시대는 구원이 실제 삶에 적용되는 과정이며, 종말론적 희망은 온 우주와 역사의 미래가 어떠한 결말로 수렴되는지를 보여주는 종합적 전망이다. 교회는 이 전체적 구도 속에서 성도들을 가르치고 훈련하며,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 역할을 감당해 나간다.

그의 신학적 통찰은 결국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 속에 신자들의 자리를 찾아주려는 시도다. 구원의 드라마가 창세 전부터 시작되어 종말에 완성된다면, 우리는 그 이야기에 필요한 반드시 필요한 배역을 맡은 존재들이다. 성부의 계획, 성자의 성육신과 구속, 성령의 내주와 성화, 그리고 종말론적 희망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놓치지 않는다면, 복음은 어느 한 지점의 이론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의 모든 존재를 바꾸어 놓는다. 장재형목사의 강조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복음은 한없이 단순하지만 그 깊이는 헤아릴 수 없고, 신학적 지식이 풍부해지는 것만큼이나 실제적 순종과 체험이 필수적이기에, 교회가 그 방향으로 성도를 안내해야 한다.

결국 이 세 가지로 분류되는 신학적 골격은, 구원 경륜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성령 시대와 성도의 성장, 그리고 종말론적 희망과 교회 공동체라는 큰 틀 안에서 완결성을 갖는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열려진 구원은 성령을 통해 신자 개개인과 교회를 거룩하게 만들고,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함으로써 역사의 종착점에 하나님의 승리를 드러낸다. 이런 맥락을 붙들 때, 신자들은 오늘의 삶을 단순히 근시안적으로 해석하거나 세속적 기준에 매몰되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을 계속 이어 나가는 자로서 살게 된다. 장재형목사가 제시하는 통전적이고 구속사적인 시각은 이 시대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방향타가 될 수 있다.

이 모든 내용을 하나로 묶어보면, 장재형목사는 한국 교회 현장에서 오랜 사역 경험을 바탕으로, 복음의 본질을 흐리지 않고 직설적이며 간결하게 제시하려고 애쓴다. 복잡한 신학 체계나 지엽적 해설 때문에 정작 구원의 단순성이 가려지는 것을 경계한다. 동시에 복음이 단순하다고 해서 얄팍하거나 피상적인 것은 결코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성육신, 십자가, 부활, 성령 강림, 종말의 완성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깊이 파고들면 들어갈수록, 인간적 이해와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든 이 복음을 듣고 진지하게 응답한다면,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받아들이고 거듭나며, 종말론적 희망 속에서 현재를 새롭게 해석하게 된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이런 복음의 흐름을 명확히 가르치고, 신자들이 직접 체험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전도와 선교의 동력도 바로 여기서 나온다. 복음의 힘을 맛본 신자는 그것을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고, 타인에게도 그 생명력을 나누고자 한다. 이 모든 과정을 주도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며, 종말에 이르러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완성이라는 최종 목적지에 도달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가리켜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구속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라고 자주 설명한다. 우리의 인생은 그 이야기 속에서 각자 맡은 소임을 감당하며,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된다.

이처럼 장재형목사를 핵심 키워드로, 구원 경륜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성령 시대와 성도의 성장, 종말론적 희망과 교회 공동체라는 세 가지 소주제 안에서 다루는 모든 내용은, 궁극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인간 역사와 우리의 삶 속에 펼쳐지는지를 하나의 큰 그림으로 제시한다. 구원은 역사적 사실이자, 신자 각인의 현재적 체험이며, 미래적 완성이라는 삼중적 의미를 갖는다. 복음의 본질은 너무나 단순하지만, 동시에 얼마나 심오한지 아는 이들은 날마다 그 진리를 붙들고 성령 안에서 성장하며, 미래를 내다보는 종말론적 시선으로 세상을 섬기게 된다. 이로써 교회는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는 살아 있는 공동체가 되며, 결국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종말에 이르러 찬란한 완성에 도달할 것을 확신하게 된다.

La Trinité – Pasteur David Jang

Introduction

La seconde épître aux Corinthiens, de la fin du chapitre 12 (12.11 et suivants) jusqu’au dernier verset du chapitre 13 (13.13), constitue la conclusion particulièrement marquante de la lettre de l’apôtre Paul à l’Église de Corinthe. Dans ce passage, Paul ne se contente pas de donner de simples enseignements. Il dévoile la situation grave à laquelle il est confronté, réaffirme son autorité et la sincérité de sa vocation apostolique, et en appelle à la pureté de l’Évangile ainsi qu’à la maturité de la communauté. Ce texte est à la fois le fruit de la longue relation qu’il a entretenue avec l’Église de Corinthe, et l’ultime avertissement solennel qu’il lance.

En commentant et en prêchant ce texte, le pasteur David Jang souligne combien les problèmes de l’Église de Corinthe restent d’actualité, deux mille ans plus tard, dans l’Église contemporaine. La nature humaine et les travers de la communauté chrétienne n’ont guère changé : immaturité spirituelle, questions financières, malentendus autour de l’autorité, faux enseignements, etc. Ainsi, la seconde épître aux Corinthiens, souvent appelée la « lettre écrite dans les larmes » (tearful letter), ne se réduit pas à un document historique ; elle demeure un avertissement vivant et un message d’espérance pour toutes les Églises et tous les croyants de tous les temps.

À travers les dernières exhortations et remontrances de Paul aux chrétiens de Corinthe, le pasteur David Jang met en lumière la manière dont l’Église d’aujourd’hui peut rester solidement enracinée dans l’Évangile, tendre à la maturité communautaire, gérer correctement l’autorité des responsables et l’obéissance des membres, tout en veillant, dans le Saint-Esprit, à un examen constant de la foi et à la pratique de l’amour. Il indique également, de façon concrète, comment l’Église peut surmonter spirituellement des problèmes complexes tels que la gestion financière, les faux docteurs, les conflits personnels ou la négligence du péché.

Dans les pages qui suivent, nous proposons une relecture en cinq thèmes essentiels.

  1. 1. La réprimande ferme de Paul et la compréhension du contexte historique de Corinthe
  2. 2. L’autorité apostolique et le paradoxe de l’humilité
  3. 3. L’argent, les faux docteurs et la défense de la pureté de l’Évangile
  4. 4. L’édification de la communauté par l’équilibre entre amour, patience et discipline
  5. 5. La bénédiction trinitaire et la croissance intégrale de l’Église

Ces cinq axes, s’appuyant sur la perspicacité pastorale et le regard théologique du pasteur David Jang, visent à aider l’Église d’aujourd’hui à mieux comprendre et appliquer l’enseignement de 2 Corinthiens 12–13.

Thème 1 : La réprimande ferme de Paul et la situation de l’Église de Corinthe

  1. 1. Contexte historique et détresse de Paul
    Au cours de son deuxième voyage missionnaire, Paul séjourna à Corinthe (environ un an et demi) et y fonda l’Église, y établissant les bases de l’Évangile. Par la suite, il poursuivit son œuvre missionnaire ailleurs. Pendant son absence, de faux docteurs s’infiltrèrent dans la communauté, semant la confusion et mettant en doute l’autorité apostolique de Paul. En propageant un autre évangile, ils troublèrent la foi des fidèles. Pour endiguer cette crise, Paul écrivit plusieurs lettres et tenta de se rendre sur place, mais la situation ne se résolut pas facilement.

Le pasteur David Jang souligne ici l’ampleur de l’épreuve humaine et spirituelle que Paul a dû endurer. L’Église qu’il avait nourrie avec amour se retournait contre lui, remettant en cause sa sincérité. Alors qu’il avait donné sa vie pour l’Évangile, il devait désormais se justifier et même se “vanter” de ses exploits, une position qu’il jugeait elle-même absurde. Pourtant, par amour pour la vérité, Paul ne pouvait pas rester silencieux.

  1. 2. Parallèle avec l’Église contemporaine
    À partir de cet exemple, le pasteur David Jang met en évidence la pertinence de ces problèmes pour les Églises actuelles. Nos communautés sont elles aussi confrontées à des déformations de l’Évangile, à la remise en question de l’autorité pastorale, aux conflits financiers, aux tensions entre membres, etc. L’Église est une communauté de pécheurs rachetés, en marche vers la sanctification, mais jamais exempte de faiblesses. Ainsi, les difficultés qu’a rencontrées l’Église de Corinthe risquent à tout moment de réapparaître dans nos paroisses.
  2. 3. Quand le silence n’est plus possible : la fermeté de Paul
    Le modèle idéal de l’Évangile est celui du Christ, l’agneau silencieux d’Ésaïe 53 qui endure la souffrance. Pourtant, devant la confusion et la défiguration de la bonne nouvelle, Paul choisit de s’exprimer avec fermeté : il défend son ministère et “se vante” de manière qu’il qualifie lui-même d’« insensée ». Le pasteur David Jang en tire une leçon : l’amour authentique n’est pas un prétexte pour couvrir tous les torts, mais suppose le courage de faire face au péché et à l’erreur, et de les corriger.
  3. 4. La motivation d’amour au cœur du reproche
    Derrière la sévérité de Paul se cache un profond amour. Son désir est de voir l’Église de Corinthe fermement établie dans la vérité. Il se résout à la réprimande et à l’apologie de son ministère pour le bien de la communauté. Le pasteur David Jang considère cela comme un appel lancé aux responsables chrétiens d’aujourd’hui : devant la confusion, on ne doit pas dissimuler les fautes sous le couvert de l’amour ou se soumettre à la logique du monde, mais s’armer de fermeté et d’humilité pour ramener l’Église à la vérité.

Thème 2 : L’autorité apostolique et le paradoxe de l’humilité

  1. 1. Les signes apostoliques et la source réelle de l’autorité
    Paul rappelle qu’il a pleinement manifesté les signes de l’apôtre au milieu des Corinthiens (2 Co 12.12) : il a accompli des miracles, fait preuve de patience, enseigné. Cependant, l’Église a, non seulement manqué de reconnaissance, mais encore suspecté ses motivations sous prétexte qu’il ne recevait pas de rémunération de leur part. « Pourquoi l’apôtre ne prend-il pas d’argent de nous ? Quel est son secret ? » Ces questions trahissent un manque de gratitude et une méfiance injustifiée.

Selon le pasteur David Jang, la véritable autorité ne se vérifie pas uniquement par des miracles ou des résultats visibles, mais avant tout par la fidélité à l’Évangile, le sacrifice de soi, la persévérance et la volonté d’édifier la communauté. Autant d’éléments que Paul a clairement démontrés.

  1. 2. Le but de l’autorité : édifier, non détruire
    Dans 2 Co 13.10, Paul affirme que l’autorité qui lui est accordée n’a pas pour but de détruire, mais de bâtir. Voilà le fondement même de l’autorité dans l’Église. Celle-ci ne doit ni oppresser les croyants ni démolir la communauté, mais seulement la fortifier et la conduire à la maturité. Le pasteur David Jang insiste sur l’importance, pour les dirigeants d’aujourd’hui, de se souvenir de cette finalité. L’abus d’autorité blesse l’Église, tandis qu’un manque total d’autorité peut conduire à sa désintégration. L’autorité doit être exercée conformément à sa raison d’être : l’édification du corps de Christ.
  2. 3. La puissance dans la faiblesse : la logique de la croix
    À l’exemple du Christ, qui a semblé faible sur la croix mais a révélé sa puissance par la résurrection, Paul soutient que c’est dans sa propre faiblesse que se manifeste la force de Dieu (2 Co 13.4). Une telle vision doit prémunir les responsables chrétiens contre toute glorification excessive d’eux-mêmes, et empêcher l’Église de succomber à un esprit de triomphalisme. Pour le pasteur David Jang, l’aveu de la faiblesse et la totale dépendance à la puissance divine consolident l’autorité véritable.
  3. 4. Incidences actuelles : gérer la tension entre autorité et humilité
    L’Église d’aujourd’hui oscille souvent entre un leadership autoritaire et un abandon de toute autorité. Au regard de l’exemple paulinien, le pasteur David Jang enseigne que le véritable leader chrétien doit unir l’autorité et l’humilité. L’autorité est nécessaire pour défendre la vérité et faire grandir la communauté, mais elle doit se déployer dans la modestie, selon l’esprit du Christ. Cette tension ne peut être gérée que sous la direction du Saint-Esprit, et reste un défi permanent pour tous les conducteurs ecclésiaux.

Thème 3 : L’argent, les faux docteurs et la pureté de l’Évangile

  1. 1. Les conflits et malentendus autour des finances
    L’Église de Corinthe, relativement riche, était particulièrement sensible aux questions d’argent. Dans ce contexte, Paul n’acceptait volontairement aucun soutien financier de sa part afin d’éviter tout soupçon de marchandisation de l’Évangile. Cependant, cette précaution suscita une nouvelle suspicion : « Pourquoi refuse-t-il notre argent ? Que cache-t-il ? » Cette interrogation manifeste une conception faussée de l’Évangile, réduit à un jeu d’intérêts financiers.

Le pasteur David Jang en conclut que, si l’argent est un outil nécessaire à la vie communautaire, il ne peut servir de critère pour évaluer la valeur de l’Évangile ou la sincérité d’un serviteur de Dieu. Accorder trop d’importance à la dimension financière compromet la pureté du message de la grâce.

  1. 2. L’action sournoise des faux docteurs
    Les faux docteurs, introduits au sein de la communauté, discréditent Paul et sèment la division. À l’instar du serpent qui trompa Ève, ils sont rusés et sapent la confiance en l’apôtre, tout en propageant d’autres doctrines. Le pasteur David Jang avertit que des menaces similaires existent encore : sectes, théologies de prospérité, mentalité de profit… L’Église doit les contrecarrer avec vigilance et défendre la vérité de l’Évangile.
  2. 3. Préserver l’essentiel de l’Évangile
    La passion qui anime Paul vient de sa fidélité à l’Évangile. Lorsqu’il déclare : « Nous n’avons pas de pouvoir contre la vérité ; nous n’en avons que pour la vérité » (2 Co 13.8), il révèle son cœur de serviteur. L’Évangile, c’est la croix et la résurrection du Christ, le don gratuit de la grâce. Aucun compromis financier ou intérêt humain ne peut le dénaturer.

Le pasteur David Jang insiste sur le caractère inestimable de l’Évangile, qui repose sur la grâce offerte gratuitement et l’amour sacrificiel de Dieu. L’Église doit donc rejeter tout enseignement ou toute démarche qui subordonnerait ce message à des considérations matérielles. Sa priorité demeure le règne de Dieu, sa justice et sa vérité.

  1. 4. La femme au flacon de parfum et la saine prodigalité”
    L’attitude de Judas, qui reproche à la femme d’avoir gaspillé un parfum de grand prix pour oindre Jésus, illustre le même raisonnement erroné que celui qui prévalait à Corinthe. Le Christ corrige cette supposée rationalité et souligne que l’amour, même “déraisonnable” aux yeux du monde, est au cœur de l’Évangile. Le pasteur David Jang invite l’Église à témoigner parfois de ce “gaspillage sacré” aux yeux du monde, signe de son amour pour Dieu. Les biens matériels doivent être envisagés comme des moyens, et non une fin : la valeur véritable se trouve dans la mise en pratique de la croix.

Thème 4 : Amour, patience et discipline : les principes apostoliques pour édifier l’Église

  1. 1. La nature de l’amour et la relation communautaire
    Paul témoigne d’un amour profond pour l’Église de Corinthe. « Je ne cherche pas vos biens, mais vous-mêmes » (2 Co 12.14) exprime sa disponibilité à se dévouer pour leurs âmes. Pourtant, les croyants lui rendent souvent mépris et scepticisme au lieu de lui rendre son amour. Pour le pasteur David Jang, c’est un rappel de la nature authentique de l’amour chrétien : un don volontaire et sacrificiel, qui n’exige pas forcément de réponse immédiate.
  2. 2. La patience, une vertu cruciale
    L’amour est patient (1 Co 13). Dans la détresse, Paul continue de supporter et d’attendre un changement de la part des Corinthiens. Cette patience ne résulte pas d’une faiblesse, mais d’une volonté stratégique de préserver la communauté. Le pasteur David Jang définit la patience comme la force de « tenir bon et d’attendre, malgré la douleur, dans la poursuite du bien ». Cependant, la patience n’équivaut pas à tolérer indéfiniment le péché et le mensonge : au moment opportun, il faut agir pour restaurer la vérité.
  3. 3. Le rôle nécessaire de la discipline
    Dans les premiers versets du chapitre 13, Paul déclare qu’à sa prochaine venue, il ne laissera plus impunis ceux qui persistent dans le péché (2 Co 13.2). Ainsi, l’amour ne signifie pas tout dissimuler. La discipline (ou “exercice de la correction”) est un processus de purification pour la communauté et une occasion de repentance pour ceux qui se sont égarés. Le pasteur David Jang rappelle que la discipline doit être comprise comme un acte d’amour strict mais constructif, visant la restauration des âmes. Sans elle, l’amour et la tolérance peuvent conduire à la permissivité générale.
  4. 4. Rechercher l’équilibre entre amour, patience et discipline
    Aujourd’hui, il arrive que l’Église tolère le péché au nom de l’amour, ou qu’elle exerce un autoritarisme impitoyable, écrasant les croyants. Le pasteur David Jang nous ramène à l’exemple de Paul, qui illustre l’équilibre : aimer, patienter, mais finalement réagir face au péché pour amener à la repentance. La communauté grandit sainement lorsque l’amour s’allie à l’application fidèle de la vérité. Ainsi, l’Église peut incarner une communion où se conjuguent fermeté et miséricorde, un signe pour le monde d’une vérité unie à l’amour.

Thème 5 : La bénédiction trinitaire (2 Co 13.13) et la croissance intégrale de l’Église

  1. 1. Signification de la bénédiction finale
    Paul conclut sa lettre par ces mots : « Que la grâce du Seigneur Jésus Christ, l’amour de Dieu et la communion du Saint-Esprit soient avec vous tous » (2 Co 13.13). Pour le pasteur David Jang, il ne s’agit pas d’une simple formule de politesse, mais d’un véritable don trinitaire. Cette bénédiction invite l’Église de Corinthe à demeurer dans la grâce, l’amour et la communion divine. C’est un appel à entrer dans l’espace de foi où le Père, le Fils et l’Esprit s’unissent et nous accueillent.
  2. 2. La compréhension trinitaire de la communauté
    L’Église est appelée à refléter la vie d’amour partagée au sein de la Trinité. L’amour du Père, la grâce du Fils, la communion du Saint-Esprit : c’est ce courant divin qui doit animer la communauté. Quand des personnes d’origines diverses s’unissent pour former une telle harmonie, l’Église acquiert un visage distinctif, marqué par la présence de Dieu. Le pasteur David Jang exhorte l’Église à dépasser les limites de la mentalité purement humaine et à s’orienter vers la communion trinitaire.
  3. 3. La nécessité de l’examen de la foi et du progrès spirituel
    Paul demande aux Corinthiens de s’évaluer et de “vérifier leur foi” (2 Co 13.5). Ce commandement s’inscrit dans la dynamique trinitaire de la bénédiction : chacun doit reconnaître la présence du Christ en lui. Si le croyant échoue à ce test, il risque de demeurer un “chrétien de nom” et l’Église de rester fragile de l’intérieur.

Pour le pasteur David Jang, ce contrôle régulier de soi est central pour la croissance de l’Église. Chacun doit sonder son cœur, s’établir dans la vérité, et vivre dans l’amour et la communion de l’Esprit. Dans un monde envahi par le matérialisme, le syncrétisme ou la sécularisation, c’est par un tel examen continu que l’Église maintient sa fidélité à l’Évangile.

  1. 4. Le message de la bénédiction trinitaire pour l’Église d’aujourd’hui
    Dans la liturgie actuelle, la bénédiction est prononcée à la fin de chaque culte. Le pasteur David Jang insiste sur le fait que cette bénédiction ne doit pas être considérée comme un simple rituel, mais comme une proclamation spirituelle, par laquelle l’Église rappelle que la grâce, l’amour et la communion divines sont effectives dans la vie des croyants. C’est une invitation, semaine après semaine, à se recentrer sur la vérité et l’amour, et à puiser une force nouvelle dans le Seigneur.

Cette bénédiction trinitaire est le fondement sur lequel l’Église demeure inébranlable, même au milieu d’un monde en plein tumulte. Par la reconnaissance de la croix et de la résurrection, la méditation de l’amour divin et la réception de la communion de l’Esprit, la communauté devient ce que Paul désirait : un corps unifié en Christ, avec toute la richesse de ses dons et de ses diversités, et vivant pleinement l’essence de l’Évangile. Tel est l’idéal proposé par Paul et que le pasteur David Jang réactualise pour l’Église d’aujourd’hui.

Conclusion et application contemporaine

À la lumière de 2 Corinthiens 12–13, le pasteur David Jang met en évidence les difficultés des Églises anciennes et modernes et propose des pistes d’application concrètes. L’essentiel du message peut se résumer en plusieurs points :

  1. 1. La défense de la vérité et la pureté de l’Évangile
    Quelles que soient les circonstances, l’Église ne doit jamais transiger avec de faux enseignements ni dénaturer l’Évangile par l’argent, la sagesse du monde ou des calculs politiques.
  2. 2. Autorité du responsable et humilité
    L’autorité des dirigeants est un don pour l’édification de la communauté. Elle doit s’exercer dans la dépendance au Dieu tout-puissant, et non dans l’orgueil humain. L’abus ou le rejet de l’autorité conduisent inévitablement à la ruine de l’Église.
  3. 3. L’équilibre entre amour, patience et discipline
    En cas de crise ecclésiale, l’amour et la patience restent prioritaires. Cependant, elles n’excluent pas la discipline nécessaire pour traiter le péché et corriger les dérives. L’amour ne sacrifie jamais la vérité.
  4. 4. La présence trinitaire et la croissance spirituelle
    À travers la bénédiction finale, on découvre que la grâce, l’amour et la communion divines sont le socle de la vie communautaire. L’Église doit régulièrement s’examiner, veiller à sa solidité intérieure et faire progresser chaque membre dans la foi.
  5. 5. Le défi et l’espérance de l’Église actuelle
    Deux millénaires après Corinthe, les mêmes tentations guettent les communautés : sécularisation, dérives financières, divergences, etc. Mais l’enseignement de Paul, éclairé par le commentaire du pasteur David Jang, indique une voie : celle où vérité et amour, autorité et humilité, patience et discipline avancent de concert. Voilà ce qui demeure la vocation spirituelle fondamentale de l’Église à travers tous les âges.

Ce message offre aux croyants une perspective pour combattre la mondanisation, la marchandisation et l’abus d’autorité qui gangrènent parfois l’Église. Il nous exhorte à poursuivre le “bon combat” pour la vérité, à soutenir nos dirigeants légitimes, et à contribuer à l’édification mutuelle dans l’amour. Enfin, il invite chaque communauté à redécouvrir la force trinitaire : la grâce de la croix et de la résurrection, l’amour infini du Père, et la communion de l’Esprit qui unit les fidèles et fait de l’Église le corps du Christ.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신학 학생들은 기독교 변증학 과정을 성찰합니다.

장재형목사
올리벳대학교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Olivet Theological College and Seminary(OTCS)는 샌프란시스코, 리버사이드, 세인트 루이스, 워싱턴 DC 등 다양한 캠퍼스에서 학사 및 석사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독교 변증학 과정을 제공했습니다. 또한 이 과정은 온라인으로도 수강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는 기독교 신앙을 비롯한 주제를 기반으로 하여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달하는 방법 등을 다루었습니다. 기독교 변증학은 상대방에게 신앙을 옹호하면서도 긍정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다가가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변증론(Apologetics)”은 그리스어 “변증론(Apologetics)”에서 유래하며, 이는 주장이나 주제를 최선의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정을 마친 학생들 중 일부는 다음과 같이 반성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성경의 권위 등이 내 신앙의 기본적인 질문입니다. 이 수업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가 명확하게 증명 가능한 방식으로 가르쳐졌습니다. 또한 성경은 참으로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라는 온라인 학생의 의견이 있었습니다.

리버사이드 캠퍼스의 한 학생은 “이 강좌를 공부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기다렸습니다. 최근 3주 동안 전도에 대한 통찰력을 얻었고, 이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가을학기 내내 이 강좌를 이끌어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또한 수업에 참여한 모든 학생들에게 감사드리며, 신학 교육의 지속적인 발전을 기원합니다.”라고 코스 강사인 Dr. Joseph J. Lee가 말했습니다.

OTCS는 학생들이 이 과정을 통해 얻은 통찰력을 선교와 사역을 향상시키는 데 사용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들을 응원하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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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JCM 학생들은 14세기 음악 스타일의 변화를 연구합니다

장재형목사
올리벳대학교


서양 음악사 세미나에서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주빌리 음대 학생들은 14세기 교회에 대한 태도 변화가 음악에 미친 영향에 대해 배웠습니다.

아르스 노바(Ars Nova)는 중세 후기 프랑스에서 유행한 음악 스타일입니다. 이 기간 동안 유럽 사회에서는 교회가 최고 권위자로 여겨지지 않았고, 정치적 권력이 강화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작곡가들은 종교 음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리듬 방식을 벗어나 독자적인 음악을 작곡할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아이소리듬, 아이소리듬 모테트 등 새로운 음악 형식이 널리 퍼졌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종교 음악은 약화되었습니다.

이 세미나에서는 주목할 만한 작곡가인 기욤 드 마쇼(Guillaume de Machaut)와 프란체스코 란디니(Francesco Landini)의 음악을 사례로 활용했습니다. 학생들은 이 두 작곡가의 종교 음악과 세속 음악을 비교하고 차이를 분석했습니다.

이 세미나는 또한 학생들이 음악사 지식을 현대에 적용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서양 음악사의 오선보와 스타일에서 유래한 현대 음악의 요소를 조사했습니다. 교회 음악의 영향을 받은 서양 음악사를 통해 종교적이고 세속적인 전문 음악가의 발자취를 쫓으며 음악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확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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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리버사이드 R&D 센터, 여름학기에 실무 교육 프로그램 제공

장재형목사
올리벳대학교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 리버사이드 메인 캠퍼스 R&D 센터는 이번 여름 분기에 온라인 실습 교육 프로그램을 선보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Olivet Institute of Technology(OIT)의 학생들에게 기업가적 기회와 함께 현장 실습 경험을 제공하여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 프로그램은 정보기술(IT) 연구의 핵심 가치를 반영합니다. 여기에는 이론과 실제의 조화, 그리고 코딩 언어를 배우는 것과 더불어 문제 해결 및 응용 능력의 향상이 포함됩니다. R&D 센터는 학생들에게 이론과 기술을 적용하여 혁신적인 결과를 도출하고자 하는 도전적인 프로젝트를 제공합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교실에서 배운 내용을 실전에서 적용하고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센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 기술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IT 전문가로 성장하고자 하는 학생들과의 협력을 강조합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기술적 역량을 발전시키면서 동시에 신앙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리버사이드 메인 캠퍼스 R&D 센터의 이러한 노력은 학생들에게 학문적이고 도전적인 환경을 제공하여 실무 경험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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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카다도키아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Jubilee College of Music 지휘 수업으로 합창 앙상블 리더십 향상

장재형목사
올리벳대학교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Jubilee College of Music에서 제공하는 지휘 수업은 음악 학생들을 훌륭한 합창단 지휘자로 양성합니다.

지휘는 음악가들이 함께 음악을 연주하는 방법을 나타내는 신체 언어로, 합창 앙상블은 교회 예배 등 다양한 공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에 따라, 지휘 기술은 모든 음악 목회자들에게 필수적인 기법으로 간주됩니다.

이번 수업에서는 주로 자세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오른손 및 왼손의 기술적인 요소를 중심으로, 학생들은 일정한 템포에서의 일관된 박자 패턴을 유지하고, 진입, 프레이징, 템포 변경, 강약 변화 등에 대한 명확한 신호를 제공하는 방법을 연습했습니다. 이러한 연습은 음악의 이해를 높이고, 악보 준비 및 리허설 진행 등 다양한 측면에서 확장되었습니다.

팬데믹으로 인해 학생들이 실제 앙상블 리허설에서 자신의 기술을 적용하는 데 제한이 있을 수 있지만, 디지털 미디어를 활용하여 수업 중에 연습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연습의 공백을 메우고, 지속적으로 기술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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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아트 앤 디자인 스쿨, 여름 디지털 드로잉 워크숍 개최

올리벳대학교
장재형목사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예술 디자인 학교(OSAD)는 다가오는 여름 학기에 디지털 드로잉 워크숍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이 워크숍은 현재 학생들과 잠재적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되며, OSAD의 샘플 수업을 체험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디지털 드로잉 워크숍은 주로 스마트 태블릿과 Adobe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하여 캐릭터를 그리는 기술을 다룰 예정입니다. 이 워크숍은 최근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를 기반으로 기획되었는데, 이를 통해 대다수의 학생들이 디지털 드로잉에 대한 관심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OSAD의 현재 학생들은 이미 연필로 스케치하고 그림을 그리는 경험이 있어, 디지털 도구를 익힘으로써 창의성을 더욱 향상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한편, 예비 학생들에게는 이 워크숍이 학교를 더 잘 이해하고 학습환경에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번 워크숍의 강사로는 OSAD 출신이자 현재 일본에서 다양한 기업, 교회, 사역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 중인 올리비아 구씨가 참여합니다.

OSAD는 이번 주에 워크숍에 관한 세부 사항을 발표할 예정이니, 관심 있는 학생들은 꼭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함께 디지털 드로잉의 세계를 탐험하고 창의성을 키우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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