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과 옥합을 깨뜨린 여인에 대한 묵상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네 복음서에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으며(마 26:6-13; 막 14:3-9; 눅 7:36-50; 요 12:1-8), 특히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주간에 벌어진 일로 복음서 기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본문에 대한 묵상을 통해,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어떠한 사랑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하는지를 깊이 성찰하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먼저 마가복음 14장 3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셨습니다. 헬라어 본문에서 ‘나병환자’로 번역된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흔히 말하는 문둥병(leprosy)을 가리키는 말과 동일하게 쓰이지만, 오늘날 임상적 의미의 한센병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문둥병은 ‘부정하다’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격리되어야 한다’라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두 가지라고 말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부정’하다고 여겨지던 자와 기꺼이 식탁을 나누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나병환자는 공동체로부터 격리되고, 성전 출입은 물론 일반인들과 정상적으로 교류하기 어려운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율법적·종교적 장벽을 뛰어넘어 사람을 온전히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셨음을 드러냅니다. 장재형 목사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고, 치유하시는 모습은 곧 복음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여주는 표징”이라고 해석합니다.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며, 그 소식은 죄인과 병자와 연약한 자를 향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격리되어야 마땅한 이가 예수님의 식탁에 동참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복음의 실제 구현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시몬이라는 이름의 함축적 의미입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시몬이라는 이름은 매우 흔하긴 했지만(베드로의 본래 이름도 시몬), 마가복음에서 “나병환자 시몬”이라고 특정하여 적어 놓았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에 대해 ‘시몬’이라는 이름이 복음서 독자들에게 낯설지 않은 이름임을 상기시키면서, 베드로의 본래 이름이 또한 시몬이었음을 연결 지어 묵상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은, 한편으로 죄인이나 병자에게도 동일한 은혜가 적용된다는 복음의 원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문둥병은 당시 ‘하나님으로부터의 심판’ 혹은 ‘영적인 부정함’으로 이해되곤 했는데, 예수님께서 그런 시몬과 식사를 나누심으로써, 그를 향한 ‘완전한 용납’을 선언하신 셈이 됩니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가 모두 영적으로 문둥병자였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또한 죄와 허물로 죽었고,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부정한 자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그분의 식탁에 초대되어 함께 교제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는 구체적이고 상징적인 장소에서, 한 여인이 예수님께 나와 값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막 14:3). 이 여인에 대해 마태복음은 “한 여인”이라고 서술하고, 마가복음도 동일하게 “한 여인”이라고 언급하며, 누가복음은 “죄를 지은 한 여인”이 바리새인 시몬(동명이인 가능성) 집에서 예수님께 나와 울며 향유를 부었다고 전하고, 요한복음은 이 여인을 ‘마리아’라고 명시합니다. 복음서 저자들의 기록은 세부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핵심적으로는 “매우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 드렸다”는 동일한 사건 혹은 유사 사건을 전하면서, 그 여인의 행위가 지닌 사랑과 헌신의 의미를 깊이 부각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나드’라는 향유의 의미를 주목합니다. 나드는 히말라야 고산지대에서 채취되는 식물 뿌리에서 추출되는 고급 향유로, 당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매우 귀하고 비싼 기름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한 옥합을 사려면 삼백 데나리온이라는, 서민들이 거의 일 년간 일해야 벌 수 있는 거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향유 옥합 전체를 깨뜨려 예수님께 쏟아 부었다는 것은 그 여인이 지닌 ‘모든 것’을 드렸다는 상징적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주님 앞에서 이 여인은 가장 귀한 것을 내어놓았다. 그녀는 예수님의 임박한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분이 참된 왕이심을 직감적으로 알았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사랑이란 대가나 계산을 따지지 않습니다. 오직 ‘아낌없이 주는 행위’ 자체가 사랑의 본질임을 이 사건이 증언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여인의 행동에서 우리는 무조건적인 사랑, 혹은 ‘조건 없는 헌신’을 발견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두고 “참된 제자도는 언제나 허비처럼 보이는 사랑에서 꽃핀다”라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 여인의 행동은 매우 비합리적이고 낭비처럼 보이지만, 복음서 전체 맥락 속에서는 그 사랑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비하는 예언적이고 상징적인 행위였음을 알게 됩니다. 고대 근동 문화에서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왕이 되거나 제사장이 되는 등 아주 특별한 직무를 맡을 때 이루어지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지극한 사랑을 통해 예수님이 진정한 ‘기름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아이심을 선포하는 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7장 38절에서는 이 여인이 울며 예수님의 발에 입 맞추고,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신 뒤 자신의 머리털로 닦는 모습이 강조됩니다. 이는 죄인인 자신이 감히 예수님 앞에 설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예수님의 거룩한 사랑을 신뢰하는 믿음으로써 자신을 가장 낮추어 헌신하는 태도를 상징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여인이 흘렸던 눈물에 주목하며, 이는 죄와 연약함 속에서도 용납하시는 예수님의 긍휼에 대한 감사와, 동시에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고 경외하는 분의 죽음을 예감하는 슬픔이 뒤섞인 울음이었을 수 있다고 해석합니다.
이처럼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벌어진 옥합 파쇄 사건은, 장소 자체의 의미(부정했던 자가 치유되고 예수님과 함께 식사함)와 여인이 드러낸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가장 귀한 기름을 깨뜨려 부음)이 맞물려 예수님의 참된 메시아적 정체성과 복음의 의미를 풍성하게 보여줍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사랑의 사건이 복음 자체의 가장 중요한 특징, 즉 조건 없이 베푸는 사랑을 드러낸다고 강조합니다. 만약 우리 안에 계산하고 따지는 시선이 남아 있다면, 우리는 이 여인이 보여준 사랑을 오히려 ‘낭비’ 혹은 ‘허비’라고 판단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다’(고전 1:25)고 선언하며, 세상의 기준으로는 낭비처럼 보이는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의 지혜이자 구원의 능력임을 알려 줍니다.
결론적으로, 장재형 목사는 베다니에서 벌어진 이 사건이 “가장 낮은 곳, 가장 버림받은 자의 집에서 가장 값진 사랑이 펼쳐진 복음의 진수”라고 이야기합니다. 문둥병으로 인해 격리될 수밖에 없었던 시몬이 회복되어 주님과 식사를 나누었고, 죄인으로 여겨졌던 한 여인이 그 집에서 가장 귀한 기름을 깨뜨려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실제이며, 주님께서는 이런 사랑을 지금도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계산적이지 않고, 허비처럼 보이는, 무조건적이고 대가 없는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 제자들과 가룟 유다의 시각
한편, 복음서에서 이 옥합을 깨뜨린 사건 직후 혹은 중간에, 제자들의 반응과 가룟 유다의 배반이 언급됩니다(마 26:8-16; 막 14:4-11; 눅 22:3-6; 요12:4-6). 특히 마가복음 14장 45절에 보면, 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향해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라며 분노합니다. 마태복음 26장 8절은 이 ‘어떤 사람들’을 ‘제자들’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혔고, 요한복음 12장 45절은 이를 더욱 좁혀 가룟 유다라고 지목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바리새인 시몬이 이 사건을 곁에서 지켜보며 예수님이 진짜 선지자라면 죄 많은 여인이 자신께 다가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즉,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사랑을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낭비’ 혹은 ‘헛된 열정’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여러 모양으로 복음서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에 대해 “사랑을 진정으로 경험하지 못한 자에게는, 진실한 사랑의 행위가 때로 ‘허비’로 보일 수 있다”고 진단합니다. 제자들과 유다는 매일 예수님 곁에서 말씀을 들었고 여러 기적의 현장을 목격했지만, 그 사랑의 본질을 온전히 깨닫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특히 요한복음 12장 4~6절은 유다가 향유를 낭비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로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을 텐데!”라고 외친 것이, 실상은 돈궤를 맡고 있던 유다가 거기서 돈을 빼돌리려는 악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장면을 가리켜, “사랑의 세계로 들어오지 못한 사람이 결국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의도를 드러내는 법”이라 지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항변에 대해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막 14:6)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여인의 행위를 크게 기뻐하셨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제자들의 태도를 책망하시는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위가 자신의 죽음을 예비하는 것이요,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영원히 기념될 것이라 선언하십니다(막 14:8~9).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같은 사건, 같은 장면을 보고도 왜 누군가는 하늘의 비밀을 깨닫고, 누군가는 허비로만 보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 마음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담긴 마음을 지닌 자는 기꺼이 옥합을 깨뜨리고도 아깝지 않아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고 주님을 향한 시선이 계산적으로 바뀐 자에게는 모든 것이 낭비처럼 보이고, 그 안에서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방법만을 궁리하게 됩니다.
가룟 유다는 이 사건 이후에 ‘결정적인’ 변곡점을 맞이합니다. 복음서의 기록에 따르면, 유다는 대제사장들을 찾아가 은화 서른에 예수님을 넘겨주는 일에 대해 합의합니다(마 26:14-16; 막 14:10-11; 눅 22:3-6). 요한복음 13장 2절에서는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고 기록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게 된 계기를 깊이 묵상할 때, 바로 ‘향유 옥합 사건’이 그의 배반을 확고히 한 시발점이라고 설명합니다. 유다는 자신이 믿고 따르던 스승이 이토록 엄청난 낭비 행위를 용납하시는 모습을 보고, 더는 예수님이 자신이 꿈꾸던 ‘메시아 왕국의 길’을 걷고 있다고 믿지 않았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한마디로 유다는 “이분이 진정한 지도자라면, 이렇게 재정을 낭비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왜 허비하시는 것인가?”라는 자기 논리를 세웠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이미 물질에 대한 탐심이 싹트고 있었고, 계산적이고 합리적인 틀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과 사역을 재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의 뜻과 사랑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배반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제자들 중에서 유다는 가장 극단적으로 배반의 길을 택했지만, 사실 다른 제자들도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행동을 낭비로 보고 핀잔하였습니다(마 26:8).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반면교사가 된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알고 따른다고 해도, 여전히 사랑보다는 계산과 이익을 먼저 따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앞두고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를 다투었고(눅 22:24), 주님이 잡히시자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으며(막 14:50),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상황으로 내몰립니다(막 14:66-72). 사랑의 주님 앞에서조차 자기만의 잣대와 이익을 놓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장재형 목사가 반복해서 강조하듯 “우리 모두의 거울”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유월절 만찬이 끝난 뒤 그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한다”(요13:1 참조)고 몸소 보여주십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자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을 선뜻 표현하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한 ‘죄인 여인’은 전 재산과도 같은 옥합을 깨뜨려 주님을 기름부음으로써 죽음과 장례까지 준비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것이며, 그것이 때론 허비처럼 보여도 그것을 통해서 진정한 영광이 드러난다”는 진리를 재차 환기시킵니다. 제자들의 시선은 여전히 세상의 논리에 갇혀 있었고, 유다는 탐심에 이끌려 배반의 길을 선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그런 허물 많고 연약한 인간을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선언합니다.
따라서 장재형 목사는 제자들과 유다의 반응을 깊이 묵상하면서, “내 안에는 혹시 그러한 모습이 없는가?”를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예배 자리에 가까이 있으며, 말씀을 많이 들었다 할지라도, 그 심령 깊은 곳에 계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남아 있다면, ‘옳고 그름’을 내세우면서 진정한 사랑과 헌신을 ‘낭비’로 여길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끝에는, 가장 비극적인 형태로는 유다처럼 주님을 배반하는 자리까지 이르게 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주님을 배반하는 것은 단지 외형적인 ‘예수 팔아넘김’만을 뜻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서, 혹은 신앙생활 속에서 사랑을 허비하는 마음을 거절하고 손익계산만 내세운다면, 이미 우리 심령 안에 사랑의 주님을 배반하는 씨앗이 자라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 복음의 핵심으로서의 허비의 사랑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행위를 두고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막 14:9)고 하신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그 여인의 행위가 복음 메시지와 불가분한 관계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논리로 보면 허비요 낭비처럼 보이는 사랑이야말로 ‘복음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두고 “복음이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거룩한 낭비, 즉 독생자를 기꺼이 내어 주신 사랑”이라고 설명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내어 주셨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아낌없이 허비하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구원을 선물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허비’라는 관점은 고린도전서 1장 18절 이하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바울의 선포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세상적 가치관으로 보면 십자가는 이해 불가능하고 결코 합리적이지 않은 ‘낭비’에 가깝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굳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죄인을 위해 죽으셔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세상의 지혜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지혜’가 바로 그곳에 담겨 있다는 것이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모든 향유를 쏟아 부은 사건 역시 “주님 앞에서 낭비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만이 진정으로 복음의 깊이를 경험할 수 있다”는 상징적 메시지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단지 옛날 어느 동네에서 일어난 아름다운 장면 정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각자의 신앙과 삶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과연 얼마나 ‘전부를 드리는 사랑’이며, ‘허비처럼 보일 정도의 사랑’인지를 점검하게 만듭니다. 장재형 목사는 구체적인 예로써, 우리의 시간과 재정, 재능, 그리고 헌신의 태도를 들려줍니다. 시간을 쪼개어 예배하고 기도하며, 재정을 아낌없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며, 재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드리는 행위가 때론 주변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 적당히 하지.”라는 핀잔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그런 말을 들어도 기꺼이 주님께 드리는 자리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장재형 목사는 특별히, “우리의 예배가 형식이 되거나 습관에 그치지 않으려면, 옥합을 깨뜨리는 심정으로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올려 드리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예배 시간에 정성껏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이 누군가에게 ‘열정 과잉’으로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께 드려지는 사랑의 표현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선교와 구제에 힘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는 “왜 그렇게 많은 돈과 에너지를 들여 해외 선교를 하는가? 국내에도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데.”라고 비판할 수 있지만, 결국 복음의 본질은 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 사랑은 ‘지역’과 ‘조건’을 초월하기에, 어느 편에만 제한되지 않는 허비가 요구됩니다.
또한 장재형 목사는 옥합 파쇄 사건이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는’ 의미가 있음을 지적합니다(막 14:8). 예수님께서 곧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속죄의 제물이 되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이루실 터인데, 이 여인은 누구보다 예수님의 ‘미래’, 혹은 ‘운명’을 사랑의 마음으로 내다본 것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미래를 알게 된다”는 말처럼, 그녀는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했기에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암시를 직감했는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조차 “주여,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부인하거나(마 16:22), 십자가의 길을 모른 채 다투고 있을 때(막 10:35-45), 여인은 잔치석에 와서 옥합을 깨뜨리는 과감한 순종을 통해, 예수님의 ‘진정한 길’을 헤아려 드렸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점에서 “사랑은 영적 통찰력의 열쇠”라는 주장을 펼칩니다. 지적 이해나 신학적 지식만으로는 알 수 없는 예수님의 길을, 사랑을 통해 직감하고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오늘날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복음의 핵심이 ‘사랑의 허비’라는 사실을 놓치면, 쉽게 제자들이나 유다처럼 타산적 관점에 빠져 서로를 비난하고 분쟁에 휩싸일 수 있다고 합니다. 누가 얼마나 봉사하느냐, 헌금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 교회 활동에 열심이냐를 두고 비교하거나, 때로는 누군가의 헌신을 놓고 “왜 저렇게 과한가?”라는 불편함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선포되는 진정한 공동체라면,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아낌없이 쏟아 부은 여인을 기념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서로의 헌신과 사랑을 기뻐하며 한마음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이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복음 전파의 목적은 단지 교세 확장이나 개인의 성공이 아니라, 바로 이 ‘아낌없이 주는 사랑’을 삶으로 구현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이웃에게 복음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으셨듯이(요 12:24), 우리 또한 주님을 닮아 스스로 허비되는 결단을 내릴 때, 세상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게 되고 하나님 나라의 실제가 드러난다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이야기는 모든 복음서 저자들이 각기 다르게 기록했음에도 공통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사랑은 절대 낭비가 아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 사랑을 잃어버린 이들에게는 낭비로 보이겠지만,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허비처럼 보이는 그 사랑이야말로 생명과 구원의 원천인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본문을 인용하며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전능한 하나님이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방법을 택하신 최고의 사랑이며, 그 사랑을 받아들인 이들은 기꺼이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향유를 부어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비록 그것이 세상적 시선에는 낭비로 보일지라도, 바로 그 허비 안에 복음의 능력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결단은, 삶의 구체적인 지점에서 ‘옥합을 깨뜨리는 용기’를 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여전히 계산과 이성적 판단, 그리고 손익을 따지는 마음에서 자유롭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실제로 경험했다면, 그리고 장재형 목사가 말하듯이 “우리가 본래 영적으로 문둥병자였고 주님께서 치유해 주셨음”을 깨달았다면, 이제 주님께 우리의 옥합을 깨뜨려 드리는 것이 결코 아깝지 않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옥합이 우리의 재물일 수도 있고, 시간일 수도 있고, 재능이나 미래의 계획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자신의 자존심이나 세상의 지위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주님보다 더 귀히 여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깨뜨려’ 주님께 내어드릴 때, 그 헌신이야말로 가장 향기로운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세 번째 소주제에서 장재형 목사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복음은 ‘사랑의 허비’로 완성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며, 그 구원에 동참하는 길 역시 우리가 기꺼이 자신을 허비하는 사랑의 결단으로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바로 “주님이 나를 위해 먼저 허비해 주셨다”는 진실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장 훌륭한 옥합 파쇄의 사건이었던 셈입니다. 그분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기에, 이제 우리는 그 사랑을 알고, 또 다시 그 사랑을 주님과 이웃에게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나 병든 자에게나, 혹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때로는 나와 맞지 않는 사람에게까지도, 우리는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향유를 부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헌신은 절대로 헛되지 않고,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기억되고 기념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님께서 친히 약속하셨습니다.
이상으로 살펴본 세 소주제—(1)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과 옥합을 깨뜨린 여인에 대한 장재형 목사의 묵상, (2) 제자들과 가룟 유다의 시각에 대한 경고, (3) 복음의 핵심으로서의 허비의 사랑과 오늘날의 적용—를 통해 우리는 이 사건이 단순히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복음의 정수(精髓)를 담은 중대한 선언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옥합 사건은 곧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과, 그 사랑 앞에 우리가 어떠한 헌신을 드려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묻고 계신다. ‘너는 과연 옥합을 깰 준비가 되어 있느냐?’”라고 질문하며, 그 대답을 통해 우리가 복음의 깊이를 체험하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답은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 옥합을 깨뜨려 주셨고, 그 안에 담긴 무한한 사랑을 부어주심으로써, 우리도 기꺼이 옥합을 깨뜨릴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큰 사랑은 항상 ‘허비처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허비야말로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계산적인 제자들과 유다의 모습을 경계하면서, 동시에 베다니 문둥이 시몬처럼 치유와 용납의 은혜를 입은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옥합을 깨뜨린 여인처럼 감사와 사랑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 우리 삶의 가장 귀한 것들을 헌신의 예배로 바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장재형 목사가 본문을 통해 거듭 일깨우는 복음의 핵심이며, 성도가 마땅히 걸어가야 할 제자도의 길입니다. 그렇게 허비하는 사랑을 ‘미련하다’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있을지라도, 주님께서는 그 사랑을 결코 외면치 않으시며 “온 천하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함께 기억하겠다”고 약속하셨음을 붙들고, 우리 모두 옥합을 깨뜨리는 삶을 결단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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