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Ⅰ.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함 이라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6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이 간단하고도 강력한 표현 안에는 초대교회가 처한 시대적 상황,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 주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가 당면할 수밖에 없었던 세상의 조롱, 혹은 전혀 다른 가치관으로 가득했던 헬라·로마 세계의 문화적 장벽 속에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며 선교적 확신과 신학적 통찰을 드러낸 것입니다.

1세기 당시 로마제국은 정치·군사·문화 어느 면에서든 확고한 우위를 자랑하던 초강대국이었습니다. 화려한 건축물, 뛰어난 도로망, 이미 헬라적 세계관과 결합한 수준 높은 철학적 전통이 로마를 그야말로 ‘찬란한 제국’으로 빛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폐허처럼 남아 있는 원형경기장이나 포룸(Forum)의 잔해를 보아도, 2천 년 전 로마가 얼마나 강력하고 거대했는지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위세로운 제국의 중심부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십자가의 죽음은 유대인에게는 저주로 여겨지는 것이었고, 헬라인(당시의 지식인 계층)에게는 어리석음의 극치로 여겨졌습니다. 바울 스스로 고린도전서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라고 말하였는데, 이 말은 곧 로마 사람들(특히 지식인들)뿐 아니라, 당시 헬라 철학을 기반으로 고상한 학문 세계를 추구하던 이들에게 복음이 얼마나 거북스럽게 들릴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담대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오히려 이 복음이야말로“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포합니다. 세상은 저마다 자기들이 추구하는 길을 ‘능력’이라 말하지만, 사도 바울의 눈에는 그 모든 ‘능력’(혹은 지혜나 권세)이 결국 죄의 그늘 아래에서 멸망을 향해 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로마가 아무리 화려해도, 그 지식이 아무리 깊어 보여도, 권력자들이 아무리 막강해 보여도, 모든 인간은 죄의 형벌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회피할 길이 없다는 인식이었습니다. 그러니 복음이야말로 유일한 길이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편지를 읽을 때, 그가 동시에 염두에 두고 있던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떠올려 보면 좋습니다. 고린도는 항구도시로서 상업적으로 부유했지만, 하층민과 노예 계층이 많았고, 도덕적·영적 혼란이 매우 심각한 곳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과 같은 복음 전도자나, 혹은 현지의 그리스도인들이 당시 사회에서 ‘만물의 찌꺼기’(고전 4:13)처럼 취급받고 있음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낮아진 삶의 지위나 사회적 천대와는 상관없이, 이미 주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바울은 복음의‘실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복음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궁극적이고도 영원한 능력임을 확신하였으며, 그 자체로 성도들에게 영광의 표징이 된다는 사실을 가르쳤습니다.

특별히 장재형 목사는 여러 강연과 설교에서, 사도 바울의 이런 자신감과 확신을 오늘날 현대 사회의 신앙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습니다. 물질적 풍요와 급속한 정보화, 다양한 문화·예술의 발달로 눈부시게 화려해 보이는 현대 문명 앞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혹시 복음이 유치해 보이는 것은 아닐까”, “십자가라는 메시지가 고리타분하게 여겨지지 않을까” 하는 불필요한 수치심이나 위축감을 느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는 말합니다. “지금 이 시대야말로 복음의 본질이 필요한 때이다. 왜냐하면 오히려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문명과 기술, 사상과 이념의 폐해로 인해 세상은 더 깊은 혼란과 좌절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바울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선언한 것과 하나로 맞닿아 있습니다. 복음은 본질적으로 영원하며, 어떤 시대적 가치나 인간적인 평가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표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그분을 구주로 고백하기만 하면 모든 죄인이 구원을 얻는다, 라고 하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 교리가 여기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유대인만을 위한 구원이 아니다.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는 표현은, 이 복음이 온 인류를 향해 열려 있음을 설명합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은 당시에 통용되던 분류법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너희가 유대인이든, 이방인(헬라인)이든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모두 구원에 이른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사도행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예루살렘 안에서 시작된 복음이 점차 사마리아와 이방 지역으로 확장되며 열방에 선포된 역사적 사실과도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처럼 ‘복음’은 그 경계를 ‘하나님을 찾는 모든 이’로 넓히고, 그들이 주님 안에서 동일한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도록 초청하는 놀라운 초월성을 갖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2~24절에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처음에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에게 낯선 메시지였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았다”(갈 3:13)는 구약 율법적 개념 속에서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가 도무지 수용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헬라 철학자들이 추구하던 도덕적이고 지적인 ‘소피아(지혜)’의 세계에‘십자가형을 당한 사형수’가 중심이 될 수 없었던 까닭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어리석어 보이는’ 사건이야말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점을 누구보다도 열렬히 변증하였고, 또 그 변증의 토대를 하박국 선지자가 말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구절과 직접적으로 연결해 풀어 냅니다.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 바울이 처했던 상황, 그리고 그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계시와 확신을 고려하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의 태도는 단순한 ‘담대함’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 영혼을 살리는 데 있어 세상의 어떠한 지식이나 권세도 제공할 수 없는, ‘하나님만의 힘’이 십자가 복음 안에 있음을 발견한 사람의 기쁨어린 확신입니다. 가령 고전 문학 중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나 『하나님의 도시』(De Civitate Dei)를 예로 들 수 있는데,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젊을 때에는 세상의 철학과 학문을 추구하였으나, 결국 기독교 복음 안에서만이 자신이 내적으로 소망하던 ‘참된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헬라·로마 철학에 대한 애착과 탐구심이 남달랐던 아우구스티누스조차도, 회심 이후에는 십자가의 도야말로 인간이 궁극적으로 기대고 의지해야 할 ‘유일한 지혜’라고 말했습니다. 이 증언은 곧 사도 바울이 말한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선언과도 맥을 같이합니다.

장재형(장다윗) 목사 역시 이런 맥락에서 십자가의 능력을 거듭 강조합니다. 디지털 문명이 발달하고, 새로운 사상과 정보가 범람하는21세기에, ‘구원’이나 ‘속죄’, ‘하나님의 심판’과 같은 주제가 낡은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상은 인간의 죄성이 여전하고, 윤리적 혼란과 영적 공허가 더 극심해지고 있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이야말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고백이 더욱 필요한 때라는 점을 역설합니다. 크고 영광스러워 보이는 제국이나 문명, 혹은 지식이 실은 죄와 죽음으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질 수 있으며, 오직 하나님의 복음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 된다는, 2천 년 전 바울의 선언이 오늘날에도 유효하다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 고린도전서 4장 13절에서 바울은 복음 전파자로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의 자신이 “만물의 찌꺼기”처럼 취급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당대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위치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기독교는 결코 사회 상류층이나 기득권의 대다수 지지를 얻은 채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잃어버린 양”, “소외된 자들”이 은혜 안에 들어옴으로 복음이 힘을 발휘해 왔습니다. 바울의 사역을 살펴보면, 그가 로마사회나 헬라 철학의 절대적 권위에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저들은 멸망받을 자들, 복음이 필요한 자들”이라는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 뒤에는‘왜냐하면’이라는 이유(헬라어 본문에서 보이듯)가 따라옵니다. 그가 복음을 자랑스러워하고, 또 그것을 강력하게 내세우는 이유는 바로 이 복음이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새 생명을 주는,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현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또한 바울의 고백을 직접 이어받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조롱당할 때도 있고, 때로는 지성과 학문, 혹은 문화예술의 최첨단을 달리는 지식인들로부터 “기독교는 낡은 신화일 뿐”이라는 공격을 받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로마서 1장 16절의 이 고백을 다시 새겨보아야 합니다. 복음은 옛날에만 통하던 낡은 사상이 아니라, 전 인류가 맞닥뜨린 죄와 죽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붙잡을 때, 어떠한 상황에서도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외침은, 우리의 지식이나 지위를 넘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이 주는 영원한 능력에 근거한 것입니다.

Ⅱ.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바울은 이어서 로마서 1장 17절에 이르러, 복음 안에 담긴 더 깊은 의미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설명합니다. 이 구절은 로마서 전체의 핵심 주제이자, 기독교 구원론의 핵심 구절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된 마르틴 루터 역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구절에 대해 깊이 깨달음으로써 ‘이신칭의(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된다)’의 교리를 재발견하고 크게 기뻐하였다고 전합니다.

  1.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무엇보다 먼저,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란 인간이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뀌는 ‘의롭다 하심’(Justification)의 통로이며, 그 출발이자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바로 ‘하나님의 의’라는 것입니다. 율법 안에서라면, 죄를 지은 사람은 형벌을 피할 길이 없었고, 결국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의를 이룰 수 없는 존재이기에, 율법이 제시한 의의 기준에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으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분의 십자가 희생으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선언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구속 행위’로 구체화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십자가가 ‘멸망받을 자들’(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터무니없는 어리석음처럼 보이지만, 이미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한 자들에게는 생명을 주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이 능력이 바로‘하나님의 의’가 실제로 작동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죄인이 어떻게 의인이 될 수 있는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으로는 결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그 근거로 독생자의 죽음을 내어 주신 것)을 십자가에서 이루셨고,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의로워지는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표현합니다. 곧 ‘믿음에서 출발하여 다시 믿음에 도달한다’는 구조입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여러 해석이 있었지만, 가장 일반적인 이해는 ‘믿음으로 시작해서 그 믿음이 점점 더 자라나고, 깊어지고, 완성되어 가는 여정’을 말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우리가 처음에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예수를 구주로 ‘믿는’ 단계가 있지만, 그 믿음이 자라면서 삶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바라보게 되고, 궁극적으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선언 속에서 더욱 확고한 구원의 확신과 성령의 능력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등의 신학적 탐구를 살펴보면, 모두가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인간 안에 있는 공로나 행위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구원’에 대한 확신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고백록』에서 회상하며, 철학적 방황과 쾌락적 생활을 거듭하던 자신이 결국 ‘하나님을 떠난 죄인’임을 깨달았고, 로마서 말씀을 접하면서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의 길을 찾았다고 털어놓습니다. 이미 고대 기독교 시기에 확립된‘은총의 교리’가, 중세를 지나 종교개혁 시대에 들어와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 등 많은 개혁자들에게 다시 크게 부각된 것도 이 같은 원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고, 우리가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의인이 된다는 이신칭의 교리는, 오늘날까지도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구원론의 골격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맥락을 현대적으로 설파하고 있는 이들 중 한 사람이 바로 장재형 목사이기도 합니다. 그는 여러 설교와 글을 통해, 오늘날 현대인들이 자주 빠지는 함정으로 ‘자력구원(스스로 선행이나 공로로 의로워지려는 생각)’과 ‘상대주의(남에 비해 조금은 덜 죄인이라고 여기는 태도)’를 꼽습니다. 우리가 흔히 “나는 그렇게 큰 죄인은 아니야. 세상에는 나보다 훨씬 더 나쁜 사람들이 많잖아?”라고 생각하는 순간, 정작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 죄인임을 놓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해답을 우리에게 주며, 이 의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고 살아갈 때, 비로소 참된 자유와 거룩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강조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단순히 머리로만 동의하는 지식이 아니라, 목숨 걸고 붙드는 ‘전인적 신뢰’를 의미합니다. 바울이 말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러” 계속 자라고 성숙하는 것이다, 라는 설명이 이 점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1.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의 실제적 의미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구약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당대 강력한 침략 세력이었던 바벨론의 위협 앞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보호를 구하며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묵시를 그에게 주셨습니다. 이는 거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의 힘이나 지혜로 해결하기 어려운 위기 앞에서, 결국 남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이라는 초월적 진리를 강조한 것입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아 보여도, 그 가운데 하나님의 언약을 붙드는 자들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선언입니다.

바울은 이 약속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연결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바로 그 의인이며, 그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고 확장해서 해석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의 침공 앞에서 두려워 떨었듯, 오늘날도 우리는 죄와 죽음, 온갖 혼란 속에 놓인 세상을 목도하며 때론 두려움에 빠집니다. 경제적 위기, 전쟁과 기근, 질병, 그리고 일상의 크고 작은 문제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선포는, 그 모든 환경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있음을 알리는 희망의 외침입니다. 우리가 의인이 되는 것은 우리의 의로움이나 자격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즉,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해 하나님의 생명과 의가 우리 안에 들어오고, 그로 인해 우리가‘산다’는 것입니다.

“산다”라는 말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생명을 유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삶’(생명)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참된 생명’을 뜻합니다. 공동번역성경이 로마서 1장 17절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이다”라고 번역한 것도 바로 이 의미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의롭게 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말이고, ‘살리라’는 것은 바로 그 관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을 가리킵니다.

이 점에서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를 강조합니다. 교회에 오랜 시간 출석하며, 성경 지식이나 신학 공부를 많이 했더라도, 실제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면 여전히 메마른 신앙에 머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관계가 실제로 살아 움직인다면, 예배 가운데, 말씀 묵상 가운데, 삶의 순간순간 가운데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고백이 육체의 호흡처럼 자연스러워진다는 설명입니다. 이는 곧 ‘교리로서의 믿음’을 넘어 ‘인격적이고 실존적인 믿음’으로 자라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말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진행형 역사가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표현은, 우리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 날에 멸망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종말론적 확신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바벨론이 쳐들어오더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진실로 믿는 의인들은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 것처럼, 로마의 대대적인 박해와 수많은 이방 철학의 조롱 앞에서도, 바울과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독교는 인간적인 무력(武力)이나 정치 권세가 아니라, 복음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로마제국이라는 ‘당대 최강의 제국’을 영적으로 변화시켜 버렸습니다.

고대 교회사를 살펴보면,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 이후 기독교가 공인되어 제국 전역에 퍼져 나갔지만, 그 이전의 박해 시기에도 이미 무수히 많은 그리스도인이 감옥이나 원형경기장에서 죽어 가면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의 실제적 적용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세상 권세와 타협하지 않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내어 놓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확실하다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불변의 사건을 근거로, 자신들에게도 동일하게 영생이 보장되어 있음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을 우리가 지금 사는 21세기에도 동일하게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국제 분쟁, 경제적 격차의 심화, 개인적 외로움과 관계의 파괴 등, 숱한 도전과 문제가 산적한 상황 속에서, 많은 이들이 무력감과 불안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인간의 힘과 지식이 한계를 드러낼 때, 복음의 능력이 더 선명하게 빛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선언은, 이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초대교회와 동일한 소망이 있음을 알려 줍니다.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 구원을 받는 것,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all of these는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해 가능해지고, 그 믿음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역사적이고도 초월적인 사건에 있습니다.

이 과정을 가리켜,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또 요한복음 15장 13절에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대신한 대속적 죽음’이며, 그 대속의 성격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가장 완전하게 나타내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죽음을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은 나를 의롭다 선언해 주시고, 영원히 사는 길에 들여보내십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자, 로마서 1장16~17절이 지향하는 결론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여러 세미나와 강연에서,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길’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곤 합니다. 가령, 인간의 내면에 있는 죄의 습성은 한번 믿었다고 해서 단번에 모두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매일의 삶에서 계속해서 복음을 묵상하고,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실천적 거룩’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출발점은 어디까지나 ‘내 선행’이나 ‘내 노력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하나님의 의를 믿는 것”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의롭게 되는 길, 곧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길은 오직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덧붙여, 우리가 성경에서 찾는 고전적 예시로, 가령 창세기 15장 6절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는 말씀은, 이미 구약 시대부터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의로 여겨지는’ 원리로 작동했음을 시사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의로움이나 업적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칭의를 얻었고, 이 원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에 와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따라서 신구약을 막론하고, 핵심은 언제나‘믿음’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메시아가 이미 오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는 더욱 명료한 사실에 근거해 구원을 받는 시대적 축복이 주어졌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따라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이 한 구절은, 의외로 우리의 모든 신앙적 실천과 영적 여정에 영향을 끼치는 중심축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도, 우리가 사람들이 먼저 완벽해지길 바라거나, 혹은 수준 높은 철학적 사유에 도달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할 때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심을 주신다는 것을 담대히 선포하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내가 지금도 구원을 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 상태다”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확신하고 살아가는지 스스로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자랑하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배경에는, 그 자신이 이미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경험한 살아 있는 체험이 있었습니다. 결국 우리도 같은 체험을 계속해서 누려야만, 믿음에서 믿음으로 자라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삶의 경지를 실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전 작품에서 『신곡』(La Divina Commedia)으로 유명한 단테(Dante Alighieri)는,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면서 ‘믿음’을 강조했던 중세 문학의 거장입니다. 그는 서사시 전체를 통해, 인간은 죄로 인해 연옥과 지옥의 심판을 면하기 어렵지만, 결국 ‘하나님의 은총’이 있어야만 완전한 구원을 이룰 수 있음을 암시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는 신학적으로 철저히 조직되어 있지 않을 수 있지만, 중세 기독교 세계관 아래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교리가 문학적·예술적 형식을 통해 제시되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구원이 초대 교회나 사도 시대에만 통용된 것이 아니고,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 수많은 예술가와 신앙인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고백해 왔다는 점에서, 우리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성경 구절이 얼마나 심오하고 또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를 재확인하게 됩니다.

로마서 1장 16~17절은 이 모든 신앙여정의 시작점과 결론을 함께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복음이란 인간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이루어진 사건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완성된 ‘하나님의 의’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죄인인 우리가 그 의를 받아 의인으로 변화되는 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그 결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바울의 음성은 2천 년의 시공을 넘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도전으로 울려 퍼집니다. 그것은 세상의 어떤 가치나 평가에도 흔들리지 않는 생명의 능력이고, 그 중심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선언하는 바울의 천명(闡明)은, 의를 이룰 수 없던 죄인이 이제 은혜로 인해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는 신비를 드러냅니다. 이 모든 과정이 곧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의 실제적 성취이자,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의 결실입니다.

장재형 목사를 비롯하여 현대의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바로 이 복음의 핵심을 붙들고 시대를 향해 외치고 있습니다. 어떤 문화나 철학 사조도 인간의 죄 문제와 죽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지 못하나, 복음에는 그것을 해결하는 하나님의 의와 능력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단순히 지적으로만 이해하거나, 교양적 수준에서만 접할 것이 아니라, 날마다 자신의 삶에 실제로 적용하고, “오직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라는 권면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로마서를 여는 바울의 핵심 메시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는 전천후(全天候)적 진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오직 믿음으로 인간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안에서 ‘참된 삶’을 누리며 영원한 생명을 이어 간다는 진리입니다. 이 고백 위에, 사도 바울과 초대 교회, 그리고 중세·종교개혁 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성도와 교회가 서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으로써, 이 복음이야말로 궁극적 능력임을 증언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우리의 죄가 이미 용서받았음을 기억하고,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확신 가운데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선포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로마서 1장 16~17절에서 바울이 전해 주는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이며, 장재형 목사가 계속해서 외치고 있는 복음 설교의 본질적인 맥락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화려해 보이지만, 그 밑에는 수많은 죄의 문제와 결핍, 고통, 상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오직 복음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그 복음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의가 임하여 죄인이 의롭게 되고 멸망하지 않으며, 궁극적인 생명을 누리게 되는 길이 열립니다. 이것이야말로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변치 않을 복음의 핵심이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영원한 선언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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