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탁월함과 장재형 목사의 사역 철학

장재형목사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3장에서 보여준 고백은 종교적 성취를 뽐내는 자의 자랑이 아니임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복음의 압도적인 힘에 사로잡힌 자’가 던지는 가치 전복의 선언입니다. 그는 태생적 정통성, 혈통의 자부심, 학문적 권위, 그리고 율법을 향한 완벽한 열심 등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자산들을 나열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는 단 한 마디로 뒤엎습니다. 바울에게 복음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과거의 모든 유익을 배설물처럼 여기게 하고 삶의 무게중심을 완전히 옮겨놓은, 존재의 재정의를 일으킨 사건이었습니다.


관계적 지식과 ‘발견됨’의 신비

바울이 언급한 “고상한 지식”은 머리로 외우는 정보가 아니라 인격을 뒤흔드는 만남의 빛입니다. 배울수록 자기 확신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이 누구의 소유인지가 더 분명해지는 지식입니다. 바울은 지식을 소유하려 하기보다 그 지식의 주인인 분에게 소유되기를 갈망했습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는 표현은 이러한 복음의 핵심을 관통합니다. 내가 주님을 설득해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예비하신 은혜의 품 안에서 진정한 나를 되찾는 과정입니다. 이 신비로운 교환을 통해 신앙은 ‘비워냄’으로써 ‘참된 가치’에 참여하는 제자의 삶으로 이어집니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복음의 고상함’과 삶의 전환

장재형(장다윗, 올리벳대학교) 목사는 복음의 본질을 “고상함”이라는 가치로 환기하며,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지를 지속적으로 일깨워온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사역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해석과 논의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메시지를 관통하는 핵심 축은 바울의 고백과 궤를 같이합니다. 즉,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이 실제 삶에서 어떠한 결단과 헌신을 이끌어내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의 가르침이 힘을 얻는 지점은 복음을 추상적인 교리에 가두지 않고 삶의 현장으로 끌어내는 감각에 있습니다. 복음이 진리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그것이 시간과 재정, 관계의 방향, 그리고 공동체의 질서를 실제로 변화시키게 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자기부정이 따르는 일입니다. 바울이 ‘배설물’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복음이 세상의 가치 체계를 완전히 전복시키기 때문입니다. 장재형 목사가 선교와 헌신을 거듭 강조하는 이유도 복음의 고상함이 단순한 감상을 넘어, 우리가 붙잡고 있던 가치들의 위계를 새롭게 정렬하는 ‘선택의 고상함’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회심의 빛과 이신칭의의 질서

카라바조의 명화 ‘성 바울의 회심’에서 말 위에서 떨어진 사울의 모습은 복음이 인간의 자기 확신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기초를 세우는 장면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바울은 그 빛을 본 후 ‘자기 의’라는 단단한 갑옷을 벗어 던졌습니다. 장재형 목사가 이신칭의(以信稱義)와 은혜를 반복해서 붙드는 이유 역시 교회의 언어가 성과주의나 자격론으로 변질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입니다. 믿음으로 얻는 의는 인간의 노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노력이 뿌리내려야 할 자리를 바르게 정돈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뿌리가 되고 순종이 열매가 되는 ‘복음의 질서’를 회복할 때, 교회는 비로소 사람을 소모하지 않고 온전히 세우는 공동체가 됩니다.


사람을 세우는 선교와 다음 세대를 향한 비전

바울이 도시마다 공동체를 세우고 일꾼들을 양육했듯, 참된 선교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양육의 구조를 지녀야 합니다. 장재형 목사가 현지 지도자를 제자로 길러내는 방식을 강조해 온 흐름은 이러한 바울의 목회적 선교학과 맞닿아 있습니다. 복음은 멀리 뻗어 나가는 확장성인 동시에, 한 사람의 영혼에 깊이 뿌리내리는 심장의 운동입니다. 청년 사역과 교육 기관 설립을 향한 그의 열의는 미래 세대를 단순한 인력 충원 대상이 아닌, 복음의 고상함을 전수받아야 할 교회의 현재로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은혜의 탕자적 귀향과 십자가의 고난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감싸 안은 손길은 회개가 인간의 결단보다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장재형 목사가 말하는 복음의 고상함이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귀결될 때, 교회는 정죄의 칼날을 거두고 회복의 언어를 배우게 됩니다. 하지만 이 은혜는 안락함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바울이 부활의 권능과 함께 고난에의 참여를 소망했듯,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필연적으로 십자가의 현실을 수반합니다.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 속 고통받는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고난은 신앙의 실패가 아니라 때로 신앙의 필연적인 경로가 되기도 합니다.


연합과 문화선교: 십자가 아래에서의 항복

교회는 개인의 성취를 과시하는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하는 곳입니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해 온 연합 사역의 핵심은 제도적 통합이 아니라 ‘복음’이라는 공동분모 아래서의 협력에 있습니다. 또한 그는 문화를 복음을 전하는 언어로 보았습니다. 과거에 도로와 인쇄술이 그러했듯, 오늘날에는 미디어와 디지털 플랫폼이 복음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전략적 식견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만 수단이 목적을 삼키지 않도록, 플랫폼이 커질수록 메시지는 더욱 십자가를 향해 단순해져야 한다는 원칙을 견지합니다.


결론: 복음이 우리를 붙든다

영적 성장은 더 많은 일을 해내는 기술의 습득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의 리듬을 체득하는 과정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사역에서 나타나는 제자훈련, 신학 교육, 묵상의 강조는 결국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소망의 언어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선언은 우리가 의지하는 세상의 것들이 영원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겸손에서 시작됩니다. 성공과 평판은 변하지만, 복음은 세대를 넘어 사람을 새롭게 합니다. 장재형 목사의 언어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명확합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내 자존심과 기득권을 내려놓을 용기가 있는가? 고난 속에서도 부활의 소망을 노래하며 연합을 선택할 성숙함이 있는가?

결국 복음은 나를 꾸미는 장식품이 아니라, 나를 죽이고 다시 살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건입니다. 그 사건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덜 자랑하고 더 사랑하며, 덜 소유하고 더 나누는 복음의 길을 걷게 됩니다. 교회가 이 탁월한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 단순해질수록, 세상은 교회를 통해 비치는 진리의 빛을 더 선명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아포카라도키아

davidjang.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