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에베소서 3장을 중심으로 오늘의 교회가 어디에서 다시 출발해야 하는지 또렷하게 보여준다. 장재형목사 강해의 초점은 프로그램이나 성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에 있으며, 이 사랑을 아는 깨달음이 기도의 중심을 바꾸고 교회의 체질을 바꾼다는 데 있다. 옥중에서도 낙심하지 않았던 바울의 기도는 현실을 즉시 바꾸는 주문이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눈을 새롭게 하는 길이었다. 그래서 장재형 목사는 기도를 통해 문제의 목록을 줄이는 노하우가 아니라,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배우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지혜가 자리 잡으면 선택의 방향이 정리되고, 삶은 느리지만 분명한 방식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바울은 자신이 겪는 시련 때문에 성도들이 낙심하지 않기를 당부하며, 오히려 그 일이 교회의 “영광”이라고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고백을 신앙의 시선 전환으로 읽어 낸다. 복음을 선택한 결과로 오는 오해와 손해, 박해와 고난은 실패의 징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실제로 침투하고 있다는 표지라는 것이다. 고난을 미화하자는 뜻이 아니다. 다만 신자는 고난을 제거해야 할 장애물로만 대하지 않고,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경륜이 어떻게 열리는지 더듬어 본다. 이 시선이 생기면 우리는 상황의 피해자에 머물지 않고 사랑의 증언자로 선다. 낙심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
유대인의 일반적 기도 자세가 서 있는 형태였음을 기억하면, 바울의 “무릎 꿇는 기도”는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언어다. 장재형 목사는 무릎이 굽혀질 때 비로소 마음이 낮아지고, 마음이 낮아질 때 공동체가 안전해진다고 설명한다. 전략보다 먼저 무릎을 점검하라는 말은 낭만적인 수사가 아니다. 교회가 무릎에서 출발하면 언어가 부드러워지고, 부드러운 언어는 상처를 흡수해 공동체에 여유를 만든다. 그 여유 속에서 성령의 위로와 지혜가 흘러간다. 반대로 무릎이 굳어 있으면 말은 날카로워지고, 날카로운 말은 사역을 소모전으로 바꾸어 버린다. 장재형목사의 에베소서 3장 설교는 이 단순한 진실을 오늘의 교회 형편 속에서 구체적으로 상기시킨다.
그가 특별히 되뇌는 구절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라는 기도다. 겉사람은 피곤하고 낡아지지만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다. 속사람은 단순한 심리 상태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거하시는 자리이자 성령께서 능력을 공급하시는 내부의 성소다. 장재형 목사는 성령의 강건함이 주로 사랑을 실천하는 힘으로 나타난다고 해석한다. 용서해야 할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이 얼어붙을 때, 손 내밀어야 할 순간에 계산이 먼저 올라올 때, 성령이 주시는 강건함은 계산을 이기게 만든다. 그래서 진짜 영성은 특별한 체험보다 일상의 작은 순종에서 검증된다. 사랑으로 반응하려는 짧은 기도, 불평 대신 축복을 말하려는 결심, 하루 한 번의 실제 감사가 속사람을 단단하게 만든다.
바울이 묘사한 사랑의 네 차원—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도 단지 수사나 개념이 아니다. 넓이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넘어 모든 사람을 품는 보편성이고, 길이는 창세 전부터 종말까지 이어지는 하나님의 신실함이며, 높이는 하늘 보좌의 영광과 맞닿은 초월이고, 깊이는 죄인을 위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성육신의 겸손이다. 네 방향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한 점으로 모인다. 장재형목사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죄와 사망의 결박을 풀어낸 능력임을 강조하며, 이 능력이 오늘도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이 사랑은 논리만으로는 닿지 않는다. 성령의 조명이 있을 때 마음이 이해하고, 이해가 삶으로 번역된다. 그러니 에베소서 3장의 공부는 곧 기도이며, 기도는 곧 사랑을 배우는 학교다.
교회가 이 사랑으로 충만해질 때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모든 충만(플레로마)”이 현실이 된다. 충만은 감정의 일시적 고조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를 가득 채우시는 상태다. 충만한 교회에서는 예배가 관람이 아니라 참여가 되고, 사역은 성과 경쟁이 아니라 생명 나눔이 된다. 설교자는 반응을 얻는 연사가 아닌 사랑의 증언자가 되고, 성도는 소비자가 아닌 동역자가 된다. 은사는 권력의 근거가 아니라 서로를 세우는 도구가 되며, 재정은 행사를 크게 만드는 데 쓰이기보다 사람을 살리고 관계를 세우는 데 흘러간다. 실패를 비난하는 대신 회복을 돕는 문화가 자리 잡고, 그래서 낙심이 줄어든다. 장재형목사는 이 분위기를 “사랑으로 충만한 교회”의 정서라고 부른다.
그의 시선은 개인 구원을 넘어 교회와 세상을 잇는 하나님의 큰 그림으로 확장된다. 에베소서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곧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모아지는 경륜(엡 1:10)은 3장의 기도와 긴밀히 연결된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이며 성령으로 지어진 하나님의 거처다. 이 정체성이 흔들리면 교회는 자기 확장의 브랜드가 되지만, 정체성이 선명하면 교회는 세상의 균열 속에서 화해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실험장이 된다. 신학적 정통과 사회적 책임이 서로를 보완하고, 예배와 봉사, 선교와 정의가 분리되지 않는다. 모든 사역의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일 때 교회는 본질을 지키며 시대에 창의적으로 응답할 수 있다.
현장의 적용은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회의와 계획을 줄이고 무릎을 함께 굽히는 시간을 회복한다. 소그룹에서는 정보를 나누기보다 서로의 상처를 듣고 중보하는 연습을 한다. 리더십은 권한을 모으기보다 은사를 순환시키도록 설계하고, 재정은 행사 비용보다 사람을 세우는 곳으로 흐르게 한다. 배움의 목표를 지식의 양이 아니라 사랑의 순종으로 잡고, 예배의 초점을 연출이 아니라 임재에 둔다. 이런 작은 전환이 반복되면 체질이 바뀐다. 안전해진 공동체에서 복음은 멀리까지 흘러가고, 그 흐름 속에서 낙심은 힘을 잃는다. 장재형 목사는 복잡한 비전 구호보다 이런 단순한 실천이 더 오래간다고 강조한다.
개인의 자리에서도 길은 분명하다.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결단이 출발점이다. 아침의 첫 시간을 말씀과 기도로 드리며 하루의 질서를 바로 세우고,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사랑으로 반응하기로 작정한다.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위해 축복을 선포하는 짧은 기도를 반복하고, 하루에 한 번은 감사의 말을 실제로 건넨다. 이런 습관들이 쌓일 때 속사람은 강해지고, 외적 조건의 흔들림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진다. 신앙은 결국 사랑을 배우는 느린 길이며, 성령께서 그 길 위에서 우리를 단단하게 하신다. 그렇게 우리는 상황의 피해자에서 사랑의 증언자로 옮겨 선다.
마침내 바울의 기도는 영광송으로 끝난다.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장재형 목사는 이 마지막 문장을 오늘의 교회가 점검해야 할 최종 기준으로 제시한다. 예배의 중심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면 우리는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며 연출하는 유혹에서 벗어난다. 선교의 중심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면 숫자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봉사의 중심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면 박수와 칭찬이 없어도 기쁘게 섬길 수 있다. 교육의 중심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면 지식의 과시가 아닌 사랑의 실천을 추구하게 된다. 출발점은 한결같다. 무릎을 꿇어 속사람의 강건함을 구하고, 지식을 넘어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일. 그렇게 배우는 교회는 어떤 환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법을 익히며, 세상은 그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의 얼굴을 본다. 간단히 말해 장재형목사가 전하는 에베소서 3장의 메시지는 사랑으로 충만한 교회가 세상을 바꾼다는 사실이며, 그 사랑은 지금 이 자리에서 무릎으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