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적 구원의 소망 – 장재형목사

(1)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8장 18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과 장차 임할 영광 사이의 관계를 깊이 묵상하며 해석해 왔다. 이 로마서8장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라고 선포한다. 이는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삶의 다양한 고통, 혹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시련이 결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질 미래의 영광과 동등한 무게로 견줄 수 없다는 뜻이다. 곧 이 땅에선 거두지 못할 영광과 축복이 있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신자가 천상에서 누릴 영광은 측량하기 어려운 것임을 바울은 말한다.

이렇듯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반드시 고난이 동반된다고 전제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존재로 불린 신자들의 본질이기도 하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앞면이 영광이라면 뒷면은 고난인 동전의 양면 같다”고 표현한다. 실제로 그리스도인에게 닥치는 고난은 헛된 고통이 아니다. 세상적인 기준에서 본다면 결과가 불투명하고 소망이 없으며 보상 없는 수고인 것처럼 보이지만, 믿음 안에서 우리는 장래의 하나님의 약속이 실제로 주어진 미래의 보상임을 확신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오늘 겪는 여러 시험과 아픔도,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가 된다.

바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롬 8:24)라고 선언한다. 이 문장은 문법적으로 보아도 신비롭다. “구원을 얻었다”는 과거시제와 “소망으로”라는 미래지향적 표현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동시에 그 구원의 완성은 아직 남아 있다는 긴장감이 들어 있다. 신학적으로 흔히 말하는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 사이에서 신자는 살아간다. 과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죄 사함을 얻어 의롭다 하심을 받았지만, 그 구원의 최종적 완성은 아직 미래에 남아 있고, 장차 임할 영광의 날에 완전히 드러날 것이라는 의미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이 소망을 붙잡을 때, 아무리 강력한 역풍이 불어도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며 오늘을 버텨낼 수 있다고 가르친다. 세상 눈으로 볼 때 고난과 역경은 실패와 좌절의 표지처럼 보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축복이 된다. 주님이 보여주신 길이 곧 십자가의 길이었고, 십자가 이후에는 부활의 영광이 뒤따랐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도 필연적으로 고난 뒤에 영광이 기다림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고 말씀하셨다. 이 본문은 궁극적으로 의를 위해 받는 핍박과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 된다는 예수님의 선언은, ‘의로운 행위로 받는 고난이 반드시 미래의 상급으로 보응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보상신앙’이라고 부르며, 성경이 끊임없이 약속하는 미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현재의 믿음 생활을 지탱하는 힘임을 강조한다.

바울이 가리키는 미래의 영광은 단순히 개인 영혼의 위로가 아니다. 그것은 신자가 누릴 영광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확신이다. 지금 당장 눈앞에 현실적 보상이 주어지지 않고, 심지어 믿음을 지키는 대가로 세상에서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가 있다 하더라도, 그 희생이 절대 헛되지 않음을 믿는다면 얼마든지 기쁜 마음으로 고난을 이겨낼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이 말하는 ‘비교할 수 없는 미래의 영광’을 강조함으로써, 이 세상의 가치관과 반대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신자들에게 심어주려 한다고 분석한다.

바울은 이를 단순히 개인 내면의 안위나 영적 위안 수준에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죄로 인해 고통받고 파괴된 이 우주의 모든 질서가, 결국은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회복될 것이라 확신한다. 곧 그리스도의 구원은 온 우주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며, 그 완성의 날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참된 영광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신자가 미래에 품어야 할 ‘큰 그림’이다. 지금 겪는 작은 시련과 비교할 수 없는 큰 영광이 장차 이 땅에도, 그리고 신자 개인의 삶에도 도래한다는 믿음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영광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이 땅에서의 모든 인생을 마감한다 하더라도, 천상에서 우리 주님의 풍성한 상급과 영광이 보장되어 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그리스도인이 헛된 희망에 기대어 고생만 하는 존재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신자들에게는 ‘앞으로 이루어질 확실한 소망’이 있다는 사실이 믿음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실제로 이 믿음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을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붙들었다.

바울은 단순히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을 냉혹하게 인정하되 그 너머에 있는 분명한 미래를 바라보았다. 그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우리에게 “그 영광의 보증이신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권면한다. 따라서 오늘의 삶에서 시련과 낙담이 찾아올 때, 우리는 바울의 말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을 더 굳게 붙들 수 있다. 신자는 이러한 소망의 복음 속에서, 고난 가운데도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며 믿음과 사랑, 인내를 실천할 수 있는 힘을 부여받는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말하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죽음 이후 사후 세계에서 누릴 영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 곧 우주적 통치가 완전히 회복되는 종말론적 미래가 분명히 도래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때에 불의와 죄로 인하여 훼손되고 파괴된 모든 창조세계가 본연의 질서를 되찾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 이 아름다운 미래가 ‘아직’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미’ 그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 누리며 살아간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란, 이 땅의 삶을 도피하거나 외면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오늘의 고난을 바르게 해석하며 미래의 영광을 미리 맛보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바울의 ‘미래 지향적 신앙’을 통해, 우리 삶 속에서 겪는 고난의 의미를 새롭게 조망할 것을 강조한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고난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 배치된 것임을 인식하고, 그 섭리의 최종 목적지가 영광의 회복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또한 그 영광은 단지 신자 개인의 위안이나 만족에서 그치지 않고, 모든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기다리는 보편적 구원의 완성에까지 이른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처럼 장재형목사가 제시하는 ‘현재 고난과 미래 영광의 신학’은 신자들이 절망하지 않고 결승점으로 향해 달려갈 수 있게 하는 강력한 동력이 된다.

(2) 피조물의 탄식과 우주적 구원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8장 19~23절에 나타난 ‘피조물의 고대’와 ‘탄식’을 우주적 구원(cosmic salvation)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바울은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라고 선포한다. 보통 우리 인간이 미래를 고대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여기서는 놀랍게도 ‘피조물 자체’가 구원을 간절히 바라며 기다린다는 것이다.

이 ‘고대’라는 말은 헬라어 ‘아포카라도키아(ἀποκαραδοκία)’로서, 목을 길게 빼고 간절히 기다리는 모습을 형상화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내일 소풍을 앞두고 설레는 마음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새벽이 빨리 오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것과 같다. 또한 한자(苦待)에서는 ‘고통스럽게 기다린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데, 피조물이 이처럼 고통 중에도 미래를 학수고대한다는 것은 무척 인상적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말하는 ‘피조물’이 단순히 자연 생태계나 동물 세계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타락으로 인해 함께 신음하는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창세기 3장 17절에서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라는 하나님의 선언이 있은 뒤, 타락한 인간 때문에 세상은 본연의 조화와 아름다움을 크게 잃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맡기셨던 ‘땅을 다스리라’는 명령은, 애초에 지배와 억압이 아닌 ‘섬기고 보살피라’는 청지기직의 의미였다. 그러나 죄로 인해 인간은 무분별하게 자연을 파괴하고 수탈하며, 결국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신음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롬 8:20)은, 죄의 결과로 허무해진 인간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주목하며, 원래 인간은 사랑과 자비로 자연을 돌보는 주관자(主管者)가 되어야 했는데, 타락으로 인해 폭력적이고 탐욕스러운 존재가 되었다고 말한다. 곧 참된 주인을 잃어버린 땅이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흉악한 횡포자”처럼 변해버린 인간에게 학대받고 있는 아이러니가 지금의 현실이다.

따라서 세상의 물리적, 생태적 파괴는 인간 타락의 직접적인 결과다. 하나님은 이 모습에 대해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신다”(창6:6)고 기록되었고,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라고 외치며 자신의 죄인 됨을 한탄한다. 뿐만 아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롬 8:22)고 선언한다. 이것이 죄의 보편적, 우주적 영향력이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장재형목사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단지 개인적 구원이나 내면적 평안에 국한되지 않고, 우주적 회복과 생명의 질서 회복에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울 역시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고대하는 이유를 말하면서, 결국 하나님의 아들들이야말로 땅과 자연의 “진정한 주인”임을 밝힌다(롬 8:19). 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회복될 때, 그들도 함께 누릴 미래의 ‘영광의 자유’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롬 8:21).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이 된 모든 신자를 가리킨다고 설파한다. 신자들은 단지 개인의 죄 사함을 넘어, 만물을 섬기고 가꾸어야 하는 영적 특권과 책임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아직 이 땅에서 거룩을 온전히 이루지 못한 우리가 미래의 온전한 구속을 고대하듯, 피조물 역시 그 회복의 날을 기다린다. 이는 ‘회복된 우주적 세계(cosmic salvation)’를 꿈꾸는 바울의 거대한 비전이기도 하다.

바울이 그리는 이 ‘우주적 구원’의 그랜드 피날레는 요한계시록 21장에서 보여주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과 맥이 닿아 있다.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계 21:5), 모든 눈물과 죽음과 애통을 없애시는(계 21:4) 궁극의 세계가 도래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두고, 하나님께서 타락으로 인해 깨어진 창조 질서를 한순간에 그냥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만드신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결국 우리 신자들이 희망하는 종말론은, 세상과 단절된 폐허 속에서 개인만 천국으로 들어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온 우주를 회복시키시는 포괄적인 서사이자 궁극적 혁신이라는 것이다.

이 회복된 세계를 바라보는 믿음은, 오늘 우리가 당하는 여러 가지 생태적 위기와 사회적 혼돈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게 만든다. 장재형목사는 “성경은 타락 이후 인간과 만물이 함께 신음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은 결단코 이 상태를 방관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새로운 통치를 이루실 것을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따라서 신자는 창조 세계가 신음할 때 이를 애통해하며 돌이키려 노력해야 한다. 환경 보호, 약자 보호, 사회 정의 확립과 같은 가치들 역시 결국은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길에 참여하는 실천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그 나라를 함께 누릴 주체로서 피조물도 해방을 얻는다.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롬 8:21) 더 이상 죄와 파괴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유로이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바울이 “자연의 탄식”을 말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과 함께 누릴 회복을 선포하는 이유다.

사도행전 3장 2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행 3:21)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머무신다고 표현한다. 이는 종말에는 단지 신자 개인의 구원만이 아니라, “만유가 회복되는” 광대한 하나님의 구원이 펼쳐진다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우주적 구원 사상을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압축적으로 서술했다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신자들은 결국 ‘개인 영혼의 구원’과 ‘우주적 구원’ 양쪽을 모두 직시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이 우주적 회복이라는 거대한 비전을 세상에 선포하고, 또한 그 회복의 일부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아직 이 현실에서 우리는 죄와 한계에 사로잡혀 있고, 자연 환경 파괴가 심화되며, 구조적 불의가 만연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바울이 말한 대로 “긴 밤을 지새우며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는” 그 간절한 자세로, 피조물의 탄식을 함께 느끼고 기도하며 창조 세계를 돌보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고 촉구한다. 결국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확고하기 때문에, 신자는 오늘의 수고와 헌신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알고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다.

우주적 구원은 인간의 힘으로 전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 완성된다. 그러나 그 완성을 향한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목을 빼고 기다리는” 피조물 앞에서 교회는 결코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처럼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피조물의 탄식과 우주적 구원에 대한 비전은, 신자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과 땅을 함께 아우르는’ 큰 사명을 부여한다. 하나님께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창조의 뿌리를 내리셨고, 성령을 통해 계속해서 그 실체를 드러내고 계시므로,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믿음으로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3) 성령의 도우심과 기도의 비밀

로마서 8장 2627절에서 바울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라는 놀라운 말씀을 전한다. 바울은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인지를 잘 안다. 우리는 때로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고, 또 어떤 방식으로 간구해야 하는지도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두고, 신자가 정말 의지해야 할 분은 바로 ‘중보자가 되시는 성령’이심을 강조한다.

바울은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롬 8:26)고 말한다. 이는 우리의 무지와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뜻에 온전하게 부합하는 기도를 성령께서 대신 올려주신다는 의미다. 또한 성령의 ‘탄식’은 단순히 낙담이나 슬픔이 아닌, 깊은 사랑과 열정으로 우리를 위하여 호소하는 중보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한다(딤전 2:5). 히브리서 7장 25절도 예수님이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밝힌다. 그런데 우리가 이 땅에서 기도할 때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말미암아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해주실 뿐 아니라, 성령께서도 친히 우리 마음 안에 내주하시며 우리의 기도를 고쳐주시고 이끌어주신다는 점에서, 성도는 기도에 있어 엄청난 특권을 누린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진리를 설명하면서, 신자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한다는 사실은 지극히 큰 은혜이며 결코 당연한 권리가 아니다”라고 역설한다. 원래 죄인 된 인류는 감히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었지만, 예수님이 중보자가 되셔서 휘장을 찢어 놓으셨고(히 10:1920 참조), 이제 그 길 위에서 성령께서 우리 내면 깊은 곳에 함께 거하시며 기도마저도 보조해 주신다는 것이다.

바울은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신다”(롬 8:27)고 말한다. 이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우리가 때로 엉뚱한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않은 간구를 할 때도 많지만, 성령은 그 모든 부족함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간구하신다. 결국 우리에게서 나오는 기도가 미숙하고 불완전하다 해도, 성령의 내적 탄식과 중보가 그 기도를 합당한 것으로 ‘번역’해 주신다는 것이다.

이는 곧 신자가 기도할 때 경험하는 커다란 자유와 위로다. 기도란, 내가 완벽하게 준비된 언어와 의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응답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연약함과 무지를 하나님 앞에 솔직히 내려놓고, 성령의 중보하심에 맡길 수 있는 과정이라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과 연결되는 통로’라고 표현하면서,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그 통로가 쉽게 막히거나 왜곡되기 쉽다고 지적한다.

신자가 이 사실을 인식한다면, 기도는 더 이상 ‘형식적 의무’나 ‘자기 확신을 드러내는 수단’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의 은혜에 매달리는 시간이 된다. 그것은 말씀 앞에 자신을 열고, 교만함을 내려놓으며, 간절히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구하는 태도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을 아시고, 우리가 짧은 지혜로는 발견하지 못하는 길도 예비하신다. 이렇듯 로마서 8장에 요약된 ‘성령의 중보 기도’ 교리는 신자에게 엄청난 안도감을 선사한다.

또한, 이 기도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 교회를 하나로 묶는 영적 동력이 된다.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고전 12장, 엡 4장)이라고 여러 번 가르친다. 각 지체가 서로 연결되듯이, 기도 역시 각 지체를 붙들고 세운다. 성령께서 한 지체의 연약함을 보시고 탄식하실 때, 다른 지체의 기도 속에서도 동일한 마음이 부어질 수 있다. 그럼으로써 교회가 하나 되어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하며, 서로 돌보는 성령의 공동체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성령이 우리 각 사람을 중보하면서도 동시에 교회를 한 몸으로 이끄신다는 사실은, 참된 연합의 비밀을 깨닫게 한다”고 설명한다.

바울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5)라고도 말한다.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에 대한 교훈은 이 ‘인내의 신학’과 맞닿아 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큰 그림을 갖고 계시고, 우주적 구원을 이루어가시지만, 당장 그 완전함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세상은 죄와 불의가 만연하고, 그리스도인들도 육체의 연약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교회 역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여러 혼란을 겪는다. 그렇기에 성령의 기도 도우심을 받으며, 때로는 해산의 고통을 통과하듯 인내로 맞서야 한다고 바울은 권면한다.

장재형목사 역시 우리의 영적 성장과 하나님의 나라 확장은 ‘작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리는 과정’과 같다고 말하며, 이때 꼭 필요한 것이 ‘인내’라고 설명한다. 작은 씨앗이 싹 트고 열매를 맺으려면 시간과 인내의 수고가 뒤따르듯, 교회 역시 성령의 도우심 속에 기도하며 끈기 있게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이 인내의 과정 속에서 성령은 다양한 길로 우리를 이끄시고, 우리가 스스로 깨닫지 못하던 방법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신다.

바울은 8장 후반부에서 이러한 기도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를 확장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고까지 선언한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과 모든 상황 속에서도 궁극적으로 우리를 선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인간의 시선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날 때도, 신자는 성령께서 탄식하며 중보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간구해야 한다.

결국,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도우심과 기도의 비밀’은 그리스도인이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교회 공동체가 서로를 세워주며, 나아가 우주적 구원의 비전에 동참하게 하는 핵심 동력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성령은 한없이 인격적이고도 우주적이며, 동시에 우리 심령 안에 거하시는 분”이라고 요약한다. 이 말은 곧 크고 광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도 성령을 통해 실현되며, 작은 개인의 미약한 기도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합당한 응답을 받는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로마서 8장 전체에서 바울은 신자가 현재 겪는 고난, 우주적 구원,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에 대해 굳건히 증거한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는 믿음이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담대한 소망을 심어주며,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는 비전이 이 믿음을 개인 구원을 넘어 모든 창조 질서의 회복으로 확장한다. 그리고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는 선언은,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성령의 능동적 중재가 있음을 알려주어 우리를 안심케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을 현대 교회와 성도의 삶에 재적용함으로써, 세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해 왔다. 첫째, 믿음의 길에는 반드시 고난이 동반되며 그것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는 점. 둘째, 죄로 인해 깨어진 우주적 질서가 결국 하나님의 손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거시적 안목. 셋째, 이 모든 구원의 과정에서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돕고, 결국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도록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이다.

이 세 메시지는 신자가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며 참음으로 기다릴” 수 있게 하는 신학적 토대가 된다. 또한 교회는 오직 이 소망 위에서 서로를 섬기고, 세상의 아픔과 탄식을 함께 짊어지며, 미래의 영광에 대한 확신으로 오늘을 살아낸다. 이 과정에서 때로 실패나 좌절을 경험하더라도,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기도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경건의 훈련을 지속하게 된다.

결국, 로마서 8장은 바울의 구원론이 그 정점을 이루는 장이자, 장재형목사가 강조해 온 신학적 주제인 ‘우주적 구원’과 ‘성령의 역동성’을 통합적으로 보여주는 핵심 통로이다. 고통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이들에게, 미래의 영광과 우주적 회복의 비전이 위로와 힘이 된다. 또한 기도가 막히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어 답답해하는 이들에게,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이 곧 신자의 연약함을 돌보는 능력임이 선명히 드러난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로마서 8장의 메시지를 두고, “믿음의 사람은 이미 ‘어둠을 뚫고 밝아오는 새벽’을 미리 보는 사람이다”라고 평한다. 그리고 그 새벽의 빛은, 현재의 고난을 능히 감당하게 해주고, 함께 고통당하는 피조세계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마땅히 기도할 바를 깨닫도록 이끌어 주는 성령의 조명이다. 이 성령의 조명 아래, 신자는 오늘의 가시밭길에서도 내일 피어날 꽃을 기대하며 전진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로마서 8장에 요약된 바울의 가르침은 현재 교회가 세상 속에서 가져야 할 구체적 태도에 대한 지침을 준다. 세상의 흐름이 혼돈과 절망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리스도인은 이미 마음속에 ‘비교할 수 없는 미래의 영광’을 담아두고 있다. 환경 파괴와 생명 경시 사상이 만연해도, 우리는 ‘피조물의 탄식’을 들으며 우주적 구원을 향해 협력할 수 있다. 또 온갖 경제적, 사회적 위기에 떠밀려 기도를 멈추고 싶은 순간이 와도,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을 믿고 다시 무릎을 꿇는다.

이처럼 장재형목사가 해석하는 로마서 8장은, 교회와 성도가 나아갈 길을 세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어떤 고난도 미래 영광과 비교해 낙심하지 말 것. 둘째, 나와 무관해 보이는 자연과 사회의 고통 앞에서도 보편적 구원 비전을 가지고 실천할 것. 셋째, 우리의 기도와 삶을 성령의 도우심에 굴복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매일 구하며 순종할 것. 이것들이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사명’이며, 끝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통로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핵심이자, 사도행전의 결론이며(행 28:31), 로마서 8장이 가리키는 최종 목적지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눈이 세상의 불확실함에만 고정되면 쉽게 좌절하겠지만, 하나님의 주권과 역사의 궁극적 수렴점을 바라보는 신앙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결국, 로마서 8장 18-27절에 담긴 내용은 바울의 복음 신학에서 핵심적인 주제를 이룬다. 그리고 장재형목사의 해설에 따르면, 이 본문이 말하는 ‘현재 고난과 미래 영광’, ‘피조물의 탄식과 우주적 구원’, ‘성령의 도우심과 기도의 비밀’은 따로 떼어 놓고 볼 수 없는 유기적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다. 오늘의 고난이 허무하지 않음은 우주적 구원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이며, 이 믿음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간구와 기도가 필수적이라는 논리적 흐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전체에서 먼저 사람의 죄와 의로움, 율법과 복음의 문제를 깊이 다룬 뒤, 8장에 이르러 구원의 놀라운 결말과 성령의 능력을 찬양한다. 이는 구약의 결론이 예수 그리스도이듯, 신약의 결론이 ‘하나님의 나라’임을 보여주는 흐름과 일치한다. 장재형목사는 그 완전한 구원에 대한 비전을 회복해야만, 교회가 세상을 향해 제대로 된 복음을 선포할 수 있고, 신자들 역시 세속적 가치에 흔들리지 않으며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한편, 우주적 구원은 결코 막연한 이상이 아니다. 바울은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는 부활의 완성,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광스러운 통치를 언급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성경이 제시하는 종말론은 절망의 종말론이 아니라 희망의 종말론”이라고 가르친다. 세상 종교나 세속 이념들의 종말론이 대개 파국적 멸망이나 인간 자체의 힘으로 만드는 불완전한 유토피아를 말하는 것과 달리, 성경은 만물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적극적 구원 행위를 선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종말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종말을 기대하며 오늘을 성실히 사는 사람이다. 이는 로마서 8장에서 말하는 소망의 기초이며, 성령 안에서 그 소망을 현실로 가져오기 위해 수고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장재형목사는 “보이지 않는 소망을 바라보면서 참는 자가 결국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할 것”이라는 바울의 말을 인용하며, 우리 시대의 교회가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창조 세계의 탄식을 회피하지 말며, 기도를 포기하지 말 것을 거듭 호소한다.

마지막으로,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8장 24절 말씀인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라는 구절이 신자들의 실제 삶에 주는 의미를 강조한다. 보이는 현실이 아무리 참혹해도, 신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더 실재하는 것처럼 바라볼 수 있다. 왜냐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이기 때문이다. 이 ‘보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신자가 설 수 있는 확고한 터전이다.

결국 우리가 “이미 얻었다”고 선언하는 구원은, 실제로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구원’이기에, 지금도 세상을 뒤흔드는 죄와 불의의 세력 사이에서 영적 전투가 일어난다. 피조물은 신음하고, 교회는 때로 내부 갈등과 외부 핍박으로 힘겨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의 최종 결과가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 안에서 승리로 결정되었다는 사실이야말로 바울이 선포하는 복된 소식이다.

신자는 그 승리가 완전하게 현실화될 종말을 바라보며, 오늘을 성실히 살아가는 ‘순례자’다. 그리고 그 길을 가는 동안, 장재형목사가 누누이 강조하듯, 홀로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와 중보 기도를 힘입는다. 성령은 우리의 나약함을 긍휼히 여기시고, 불완전한 기도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바꾸며, 우주적 구원 비전에 동참하도록 날마다 격려한다.

이처럼 로마서 8장에 나타난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 피조물의 탄식과 우주적 구원, 성령의 도우심과 기도의 비밀’이라는 세 가지 축은, 장재형목사가 풀어내는 신학적 메시지의 핵심이다. 첫째, 현재의 고난 속에 살지만 장차 임할 영광을 보고 담대하라. 둘째, 피조물의 신음이 무의미하지 않으니 우주적 구원을 향해 함께 전진하라. 셋째, 성령께 기도의 무거운 짐을 맡기고, 그분의 탄식하심과 중보하심을 신뢰하며 기도하라.

이 세 소주제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소망, 그리고 매일의 경건 생활이 어떻게 하나로 연결되는지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로마서 8장은 개인 구원에서 끝나지 않고 우주의 종말론적 회복을 제시하며, 그 한가운데에서 성령의 내주하심을 강조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이 얼마나 과격하고 혁명적인 메시지인가. 성경이 선포되는 곳에는 결코 현상 유지와 고착화가 있을 수 없다”고 언급한다. 실제로 복음이 들어간 지역과 세대마다, 우상 숭배와 불의가 타파되고 교회가 세워진 역사가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 8장 18- 27절은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신자를 거룩한 소망으로 이끄는 힘이 있다. 그리고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해설하며,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고난을 해석하고, 어떻게 피조세계의 아픔에 참여하며, 어떻게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해야 하는지를 실천적 과제로 제시한다. 만일 신자들이 이 메시지를 참되게 붙들고 산다면, 어느 상황에서도 절망에 매몰되지 않고, 오히려 소망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결국 오는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거듭 강조하는 바와 같이, 이 모든 구원의 과정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내거나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이지(빌 4:13), 우리 인간의 힘으로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우주적 구원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겸손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성령의 도우심에 의존하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고대하는 사람이다.

이와 같은 로마서 8장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교회가 세상 가운데 빛과 소금이 되도록 촉구한다. 흔히 세상이 교회에 기대하는 ‘사회 참여’나 ‘윤리적 책임’은, 바울이 말한 우주적 구원과 분리되지 않는다. 창조 세계가 신음하는 소리를 듣고, 그 회복을 위해 기도하며, 작은 것이라도 실천하는 교회야말로‘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징표가 될 것이다. 장차 올 영광의 나라를 지금 부분적으로나마 드러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의 메시지를 묵상할 때, 우리는 깊은 위로와 함께 무거운 책임감을 동시에 느낀다. 책임감이라 함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정을 돌보고, 이웃을 사랑하며,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불의한 제도를 개선하는 등,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가져오는 다양한 방식의 참여를 뜻한다. 동시에 위로라 함은, 우리가 지치고 실패할 때도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도우시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이다.

결국, 로마서 8장 18- 27절은 기독교가 단지 영적 위로에 그치는 개인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는 강력한 종말론적 신앙이자, 우주적 차원의 구원을 지향하는 보편적 복음임을 웅변한다. 그리고 이 신앙을 구체적으로 적용하도록 안내하는 것이 바로 장재형목사의 해설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를 통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라는 말씀에 담긴 복음을 오늘의 자리에서 체화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에 더해, 우주적 회복이라는 담대한 미래가 예언되어 있으니, 신자가 지금의 삶 속에서 능동적이고도 긍정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현상 세계가 죄로 왜곡된 것이 사실이고, 다양한 고통과 모순이 여전하지만,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그것이 ‘소망’이며, 오늘의 실천과 기도를 견인하는 동력이다. 만약 이 소망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세속적 절망이나 허무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로마서 8장 18- 27절이 가르치는 핵심 주제 세 가지를 다시 살펴보자. 첫째, “현재의 고난은 장차 임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는 선언을 통해, 고난을 영적으로 해석하고 그 너머를 바라보는 신앙 자세를 배운다. 둘째,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 창조 세계 전체가 함께 회복될 우주적 구원을 소망하며, 교회가 그 회복의 통로가 되도록 부름받았음을 깨닫는다. 셋째,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의 한계를 초월해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도록 도우시는 성령의 역할을 체험하게 된다.

이 세 소주제는 상호 보완적이면서도, 한 궤를 이룬다. 고난의 해석은 미래 영광의 비전 속에서 이루어지고, 우주적 구원의 큰 그림이 없이는 현재의 고난이 자칫 자기연민이나 무기력으로 빠질 위험이 있지만, 이 그림을 알면 교회가 세상을 섬기는 동기가 생긴다. 그리고 결국 이를 현실화하고 이뤄가는 실제적인 힘은 성령의 도우심과 기도에서 나온다. 그 기도 안에서 신자는 새로운 용기와 지혜, 그리고 구체적인 실행 의지를 얻게 된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보증하는” 성령의 임재에서 비롯된다. 바울이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롬 8:23)라고 부르는 성령의 내주(內住)는,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확증해 주는 가장 분명한 증거다. 그 증거 아래에서 우리는 ‘양자 된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 우리의 몸, 곧 우리의 전 인격과 교회 전체가 완전히 구속되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영광스러운 형태로 변화될 날을 소망한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부분이 현재 교회의 중요 과제라 말한다. 신자 각자가 성령의 손길 속에서 점점 변화되며, 나아가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선을 실천해나가는 것이다.

이렇듯 로마서 8장 18- 27절은 바울 신학의 정수 중 하나다. 장재형목사가 꾸준히 가르쳐온 대로, 고난이 있는 자리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올리고, 피조물의 탄식 앞에서는 하나님의 큰 그림을 바라보고, 기도할 때마다 성령의 중보하심에 의지해야 한다. 이 원리대로 살 때, 교회는 “역사를 변화시키는 급진적(radical) 공동체”가 될 수 있으며, 개인은 ‘구속의 은혜’를 일상에서 실현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로마서 8장의 이 메시지를 붙잡는다면, “오늘의 아픔”이 “내일의 소망”을 향한 통로가 된다. 피조물이 신음하는 것을 보며 ‘아직 멀었다’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고 함께 탄식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창조 세계의 회복에 참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 성령께서 우리의 약함을 돕고 계시므로,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우리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영광의 궁극적 완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선명해진다”라고 말하며, 이 영광을 바라보는 교회가 이 땅의 절망과 한계를 뛰어넘어 세상을 섬기는 구체적 행위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전망이 이 땅의 구체적 문제와 동떨어진 미래 환상으로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현재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능력이 오직 성령의 도우심과 탄식 어린 기도를 통해 가능함을 로마서 8장을 통해 분명히 배운다.

결국, 이 모든 내용을 종합하면, 바울이 말하는 ‘현재의 고난’은 우연적이고 무의미한 일이 아니며, ‘장차 받을 영광’ 또한 막연한 관념이 아니다. 피조물의 탄식과 우주적 구원은 우주와 우리 모두가 함께 갈망하는 미래이고, 그 실현을 위해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도우신다. 이러한 삼중의 메시지 안에서 신자는 ‘이미’ 얻은 구원의 기쁨과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구원에 대한 열망을 품고 살아간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이 메시지를 세상에 제대로 전한다면, 사람들은 절망과 무기력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고통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증대되는 시대일수록, ‘바로 그 고난 한가운데서 피어나는 영광’이라는 역설의 복음이야말로 절실히 필요한 소식이다. 우리가 이 복음을 붙들고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통해 역사하시며, 종말에 이루실 우주적 구원의 전조를 이 땅에서 조금씩 실현하게 하신다.

이처럼 로마서 8장 18-27절의 풍성한 내용은 단지 옛 문헌에 담긴 사도 바울의 교훈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통해 고난에 대한 책임 있는 태도, 피조물과 함께하는 연대, 그리고 성령을 의지하는 기도의 삶을 끊임없이 설파해 왔다. 그 결과 개인 신앙과 교회 공동체, 그리고 사회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아들들”이 드러나는 길을 모색해 왔다.

종국적으로, 바울이 바라보는 구원의 시야는 개인 구원을 넘어 온 우주적 영역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가는 데 필요한 힘은 성령께서 공급하신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라는 선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이 아무리 복잡하고 고달프다 해도, 장재형목사가 말하듯 우리는 이미 ‘비교할 수 없는 미래의 영광’에 참여할 것임을 믿기에, 오늘 또 한 발 내딛을 수 있다. 그 믿음이 있는 한, 우리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통로가 되며, 피조물의 탄식 역시 언젠가 끝나고 기쁨의 찬양으로 바뀔 것이다. 그리고 이 놀라운 전환을 위한 중요한 열쇠가 바로 ‘성령의 도우심에 의지한 기도’다.

이것이 로마서 8장 18절부터 27절까지에 대한 장재형목사의 해석이 제시하는 최종적 비전이다. 신자는 오늘의 현실에 매몰되지 않으며, 우주적 구원을 꿈꾸며, 성령 안에서 기도의 자리를 지킨다. 그리고 이 삼중의 태도가 결코 낭만적 환상이나 수동적 체념으로 흐르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섬기고 바꾸는 동력이 됨을 우리는 교회사와 신앙의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 피조물의 탄식과 우주적 구원,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과 기도의 비밀이 삼위일체적 구원의 전망 안에서 통합적으로 빛난다는 것이, 바로 로마서 8장 18-27절이 우리에게 주는 복된 소식이다.